‘야생의 땅 : 듀랑고’에서 유전공학을 선보이다 : 게임과 함께 한 인생 일기③ [쿠키칼럼]

기사승인 2023-09-14 13: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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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의 땅 : 듀랑고’에서 유전공학을 선보이다 : 게임과 함께 한 인생 일기③ [쿠키칼럼]
2018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서비스했던 넥슨의 야생의 땅 듀랑고. 넥슨

[쿠키칼럼-이유원]

‘야생의 땅 : 듀랑고(듀랑고)’는 그리 긴 시간 동안 서비스한 게임은 아니었지만 게임사적으로 꽤 의미가 컸던 작품이다. 리니지라이크 장르에 치중되어 있던 당시, 콘솔 게임에서나 볼 수 있던 크래프팅과 생존 장르를 바탕으로 국내에서 거의 처음 출시된 오픈월드 샌드박스형 모바일 MMORPG(역할수행다중접속게임)였기에, 게이머들의 기대는 무척 컸다. 공룡이 뛰어다니는 시대로 타임 워프한 유저들이 자원을 모으고 사냥을 하며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게임 컨셉은 출시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았으며, 무엇보다 듀랑고가 추구하는 게임 내의 ‘자유도’가 많은 게이머들을 기대하게 했다. 

당시 나도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적 있는 ‘팀 선비’ 동료들과 듀랑고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울티마 온라인을 떠올리게 하는 고정되지 않은 플레이어 역할과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가능한 콘텐츠들은 금방 그 세계의 매력에 유저들을 빠져들게 했다. 친구들과 함께 하면서 서로 분업도 하고, 아지트도 짓고, 다른 유저들과 경쟁하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던 기억이 난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당시 나는 우리 부족의 요리를 담당하는 캐릭터였다. 사냥꾼 친구들이 공룡을 사냥해서 생고기를 직접 지은 재료 창고에 쌓아두면, 나는 열심히 굽고 지지고 볶으며 부족원들을 대접할 요리를 만들었다.

그런데 부족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일의 양이 점점 늘어났다. 내가 스테이크를 굽는 속도보다 재료 창고에 생고기가 쌓이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 때도 열심히 요리를 하고 있는데, 막 사냥에서 돌아온 사냥꾼 부족원이 불평했다.

“스테이크가 다 떨어졌네. 언제 채워 넣을거야?”

“고기가 너무 많이 쌓여있어서 한참 걸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사냥을 해!” (조리된 음식을 먹으면 사냥에 보너스를 받는다)

“미안해. 혹시 지금 사냥 꼭 가야 해?”

“내가 사냥을 가야 고기를 모으지!”

“.? 고기를 왜 모으는 건데?”

게임을 하다보면 이걸 왜 하고 있는지 망각하는 일이 종종 있다. 우리도 그렇게 끝나지 않는 무한대의 굴레를 그냥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만큼 그 세계와 역할에 몰입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요리와 공동 생활 뿐만 아니라 나는 듀랑고의 자유로운 인터랙션에도 무척 관심이 많았다. 대부분의 사물은 어떤 방식으로든 가공이 자유로웠고, 가공할 때 그 가공 방식의 특성에 맞게 변형되었다. 어느 날, 명절 이벤트로 각 부족에 누에가 지급되었다. 좋은 유전자를 가진 누에를 잘 키워서 예쁜 옷을 만들어 입으라는 취지였는데, 이 누에가 현실을 반영한 것인지 삶았을 때 사냥꾼들에게 큰 버프를 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기존에 굽던 고기보다 효율도 좋았다. 그렇게 우리 부족은 누에로 실을 짜기보단, 누에를 번식시켜서 삶기로 결정하고 열심히 누에를 키우기 시작했다.

자연히 요리사였던 내가 누에의 번식까지 맡아 하게 되었는데, 어떤 누에를 번식시킬지 선택하는 과정에 실수로 삶은 누에를 눌러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삶은 누에끼리 교배가 가능한 것 아닌가! 그렇게 삶은 누에 사이에서 아기 삶은 누에(?)가 태어났다. 그런데 이 아기 삶은 누에는 부모의 형질을 잘 물려받은 탓인지, 원래 삶은 누에가 제공하는 버프보다 더 큰 버프를 제공하고 있었다.

이 놀라운 발견에 가슴이 뛰었다. 다행히 착한 유저였던 나는 개발자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그리고 약간의 자랑을 위해), 실험을 통해 몇 마리의 3세대, 4세대 삶은 누에들을 탄생시킨 뒤 인벤에 이 상황을 제보했다. 유저들은 몹시 즐거워했고, 서버는 다음날 긴급 점검에 들어가 해당 버그를 수정했다.

후에 업계에서 우연히 듀랑고 출신 팀원을 만난 적이 있는데, 이 얘기를 해드렸더니 깜짝 놀라며 반가워하셨다. 꽤 큰 이슈였다고, 제보 글도 기억이 난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꽤 뿌듯했다.

비록 듀랑고는 사업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나에게 시사한 바는 무척 컸다. 듀랑고 팀에서 NDC 등 각종 강연과 매체에 나와 자신들의 기획 의도와 노하우를 전달한 것들은 인터랙티브한 게임을 만들고 싶던 내게 큰 영감을 주었다. 여전히 듀랑고 팀의 NDC 강연 주제였던 ‘어떻게 하면 가죽 장화를 먹게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머릿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정도로, 인터랙티브 게임을 관통하는 정확하고 재치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팀에서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게임들을 기획하고, 콘텐츠를 추가할 때마다, 듀랑고의 선례와 노하우는 큰 양분이 되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게임은, 게이머들에겐 추억이며 업계인에겐 유산인 것 같다. ‘재미있는 게임을 어떻게 만들까’라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질문은 마치 거인의 어깨를 딛고 올라가는 것처럼 서로서로 고민하고 시도하며 그 답을 찾아나간다. 나에게는 이것이 단순히 게임 그 자체뿐만 아니라, 게임 산업과 문화 자체를 좋아하는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야생의 땅 : 듀랑고’에서 유전공학을 선보이다 : 게임과 함께 한 인생 일기③ [쿠키칼럼]
이유원 반지하게임즈 대표

이유원
1995년생. 초등학생 때부터 독학으로 인디게임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던 아이는 어느새 3년차 게임회사 대표가 되었다. 성균관대학교 글로벌리더학부를 졸업하고, ‘아류로 성공하느니 오리지널로 망하자’는 회사의 모토를 받들어 올해 성균관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자퇴했다. 게임 기획자로서 ‘허언증 소개팅!’ ‘중고로운 평화나라’ ‘서울 2033’ 등 기존에 없던 소재와 규칙의 게임을 만드는 것을 즐긴다. NDC, G-STAR, 한국콘텐츠진흥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 지역 고등학교 등 다양한 곳에서 인디게임 기획과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 장르에 대해 강연해왔다.

yuwon@banjihagame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