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음 끝판왕 ‘레베카’, 속은 시원하다만 [쿡리뷰]

기사승인 2023-09-22 06: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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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음 끝판왕 ‘레베카’, 속은 시원하다만 [쿡리뷰]
‘레베카’ 공연 실황.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한 편이 긴 시간 사랑받으려면 어떤 미덕이 필요할까. 올해 한국공연 10주년을 맞은 뮤지컬 ‘레베카’는 노래 한 곡만으로도 롱런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4분여의 짧은 곡 하나가 3시간에 가까운 작품 러닝타임을 압도한다. 달리 말하면 ‘킬링 넘버’ 한 곡 외엔 별다른 매력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초반 전개는 느릿하고 반전을 풀어내는 방식은 김빠진다. 무엇보다 주요 인물들에게 공감하기가 어렵다. 감정을 이입할 캐릭터가 없으니 차력에 가까운 가창만 남는다. 미덕보단 한계가 더 돋보인다.

작품은 네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첫 번째 주인공은 ‘나’. 귀부인에게 고용돼 근근이 살아가다가 상류층 남자 막심 드 윈터를 만나 결혼한다. 두 번째 주인공 막심은 자상한 남편이지만 죽은 전 아내 레베카 이야기만 나오면 돌변한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저택 집사 댄버스 부인은 틈만 나면 레베카 타령이다. 그가 바로 세 번째 주인공이자 이 작품 인기 스타다. 댄버스 부인은 저택 안주인 노릇을 완벽하게 해냈던 레베카를 거론하며 끊임없이 ‘나’를 비웃는다.

고음 끝판왕 ‘레베카’, 속은 시원하다만 [쿡리뷰]
‘레베카’ 공연 실황. EMK뮤지컬컴퍼니

마지막 주인공은 죽은 레베카다. 작품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존재감이 상당하다. 온통 레베카의 취향으로 꾸며진 저택은 음산하고, 계속되는 레베카와의 비교에 ‘나’는 숨이 막힌다. 작품 주요 배경인 맨덜리 저택은 계급 사회와 가부장적 사회가 교차하는 곳. ‘나’는 완벽한 상류층 안주인이 돼야 한다는 공포스러운 압박에 시달린다. 레베카의 망령은 그런 ‘나’의 부담감에 불씨를 댕긴다. 그러니까 ‘레베카’는 계급 격차와 가부장제가 한 여성을 어떻게 미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적어도 원작 소설은 그렇다.

뮤지컬 ‘레베카’는 이 지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나’를 조여오는 원인을 ‘옛 아내를 잊지 못하는 남편’으로 한정하고, 그가 각성하는 원동력도 가족애로 포장한다. 우유부단하고 회피 성향인 데다 분노조절도 못 하는 막심은 ‘레베카’에서 한껏 이해받는다. 작품은 이 매력 없는 남성 주인공을 연민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는다. 레베카가 왜 막심을 기만했는지, ‘나’는 어떤 심리 변화를 거쳐 각성했는지, 댄버스 부인은 레베카의 무엇을 추종했는지 등을 상상할 실마리조차 주지 않는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자들이 원하는 건/ 당신 같은 사람”이라거나 “여자는 더 강한 존재야/ 사랑을 위해 싸울 땐” 같은 가사는 그대로다. 관객들이 코웃음을 쳐도 이상하지 않을 가사다.

밋밋한 이야기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은 배우들이다. 배우 신영숙·옥주현·리사·장은아는 각기 다른 광기로 댄버스 부인을 표현한다. 장풍 쏘듯 고음을 뿜어내는 댄버스 부인의 대표곡 ‘레베카’는 잠시나마 서사의 헐거움을 잊게 한다. 뮤지컬에 처음 도전한 그룹 레드벨벳 멤버 웬디는 성실하게 ‘나’를 연기한다. 다만 막심 역 배우들 중 류정한·민영기와는 나이가 20년 넘게 차이 나 로맨스의 설득력이 약하다. 공연은 오는 11월19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신한카드홀에서 이어진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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