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한풀 꺾인 동력…“‘개혁 주체’ 의료 아닌 의사 됐다”

기사승인 2024-04-16 06: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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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한풀 꺾인 동력…“‘개혁 주체’ 의료 아닌 의사 됐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회의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사진=임형택 기자

4·10 총선 전후로 정부의 의과대학 정원 증원을 비롯한 의료정책 추진이 동력을 잃은 모습이다. 매일 브리핑을 통해 의료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해온 정부는 제22대 국회의원 선거 전날인 지난 9일부터 일주일째 브리핑을 중단한 상태다. 전공의들의 복귀는 요원하고 연일 압박 수위를 높이는 의료계와의 갈등을 풀기 위한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의료공백 사태는 악화일로를 걷는다.

16일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정부는 이날 오전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 브리핑을 열지 않는다. 정부는 지난 15일 개최하기로 했던 중대본 브리핑도 전날 돌연 취소했다. 중대본 또는 중앙사고수습본부(중수본) 브리핑은 지난 9일부터 일주일째 이뤄지고 있지 않다. 총선 전 연일 브리핑을 열어 전공의 복귀를 촉구하며 의료계를 향해 대화에 나서달라고 호소했던 것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정부는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통일된 대안을 조속히 제시해 달라”고 의료계를 압박하고 있지만 이전과 달리 힘이 빠진 모양새다.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15일 중대본 회의에서 “의대 증원을 포함한 의료개혁 4대 과제는 필수의료와 지역의료를 살리기 위한 선결 조건”이라며 “의료개혁 과제에 대한 발전적 논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조 장관은 “의료개혁 의지는 변함없다”고 강조했지만 정부의 상황은 다소 복잡하다. 여당의 총선 참패로 중대본 본부장인 한덕수 국무총리와 국가안보실을 제외한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차관급) 이상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 총선 이후 의대 증원 관련 발언을 삼가고 있는 대통령실의 의중은 안개 속에 덮인 채 총선 전 개각에서 제외됐던 복지부, 교육부 장관 교체도 변수로 떠올랐다. 장기화된 의정 갈등을 풀려면 정부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지만 의대 증원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여전한 만큼 그러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정부, 한풀 꺾인 동력…“‘개혁 주체’ 의료 아닌 의사 됐다”
사직 전공의들이 15일 대한의사협회 대강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의 경질을 촉구했다. 사진=신대현 기자


의료계 내분 봉합 나선 의협…“14만 의사 모두가 하나”

정부가 혼란을 겪는 사이 의료계는 이 틈을 파고들었다. 여당의 총선 패배는 의대 증원과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를 무리하게 추진한 결과라며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그간 비상대책위원장 권한을 놓고 내홍을 겪은 대한의사협회(의협)는 갈등을 봉합하고 의협을 중심으로 의견을 모으려 하고 있다. 

임현택 의협 차기 회장과 김택우 비대위원장은 지난 14일 개최된 8차 의협 비대위 회의에서 만나 서로 포옹하며 화해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이날 김 비대위원장은 “의협과 의대생, 전공의는 의사단체의 단일 요구안이 증원에 대한 원점 재논의임을 확인했다”며 “모든 의사들이 의협을 중심으로 뭉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임 차기 회장도 “14만 의사 모두가 하나라는 합의를 도출했다”고 거들었다. 그러면서 “증원 배정 절차를 진행하면서 대화하겠단 정부의 진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정부의 의대 정원 배정 중단을 요청했다.

급기야 사직 전공의 1362명은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을 직권남용 및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고소하며 박 차관이 경질되기 전까지 병원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못박았다. 이번 고소를 이끄는 정근영 전 분당차병원 전공의 대표는 15일 기자회견을 열고 “박 차관은 이번 의대 정원 증원과 필수의료 패키지 정책을 주도하면서 초법적이고 자의적인 명령을 남발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어 “박 차관이 건재한 이상 정상적인 소통은 불가능하다”면서 “이 사태의 책임자인 박 차관을 즉시 경질하고 책임을 물으라”고 요구했다.

복지부 장·차관에 대한 의료계의 사퇴 압박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전국 의과대학 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는 지난달 30일 기자간담회를 열고 박 차관의 발언들이 이 사태를 악화시킨 원흉이라며 그의 경질과 언론 대응 배제를 촉구했다. 지난달 18일 고려대 의대 교수의회도 성명을 통해 “부적절한 대처로 사태를 악화시키는 복지부 장관과 2차관은 즉각 사퇴하고, 현 사태 해결을 위해 정부는 의사단체와 협의체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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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이동하고 있다. 사진=곽경근 대기자


공수처 고발된 복지부 장·차관…“사법 절차 맞춰 대응”

조 장관과 박 차관은 이미 직권남용과 권리행사 방해 혐의로 공수처에 고발된 상태다. 임 차기 회장이 이끄는 ‘미래를 생각하는 의사 모임’은 지난달 19일 이 둘을 공수처에 고발하며 “개별 전공의들의 헌법상·법률상 권리가 의료법 59조1항의 ‘필요한 정도’를 넘어 과도하게 침해됐다”고 피력했다.

복지부는 이번 전공의 집단 고소와 관련해 별도 입장을 내지 않고 있지만, 미래를 생각하는 의사 모임의 공수처 고발 건에 대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박 차관은 지난달 19일 중대본 브리핑에서 “고발을 했으면 사법 절차가 진행될 테고 절차에 맞춰 대응해나가겠다”고 말했다.

의료계와의 관계 개선과 논의는 좀처럼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지난달 업무개시명령을 사전 통지한 전공의들의 의견 청취 기한이 15일 종료됨에 따라 병원에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들에 대한 면허정지 처분이 곧 개시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가 순차적으로 면허정지 수순을 밟을 경우 의료공백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전망이다. 최악의 경우 사직 전공의들이 수련 기간을 충족하지 못해 전문의 자격 취득 시기가 늦춰지게 되면 병원들의 전문의 수급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의대 졸업 후 전공의 과정을 시작할 예비 인턴 3068명 중 단 4.3%(131명)만이 수련을 신청하며 이미 전문의 확보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이명진 의료윤리연구회 초대 회장은 “개혁의 주체가 의료가 아닌 의사가 된 것 같아 아쉽다. 의료개혁은 의사를 위한 게 아니다. 환자가 더 좋게 더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며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걸 빼와서 대체하는 식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정부가 결자해지해서 무너진 의정 관계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짚었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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