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급하게 치러지는 대통령 선거 탓에 각 정당 후보들의 공약 속에도 빈틈이 보입니다. 큰 전환점을 맞고 있는 한국 산업의 미래는 땜질 처방이 아닌 자율 혁신으로 기약할 수 있습니다. 전 정부가 놓치고 있던, 새 정부에 바라는 산업 정책 방향들을 짚어봤습니다. |

오는 6월 대선을 앞두고 소비자 안전과 권익 보호가 주요 사회적 의제로 부상한 가운데, 정작 제조물책임법 개정과 같은 구조적 제도개혁 논의는 후보들의 공식 공약에서 빠져 있어 각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최근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유가족의 소송 패소, 항공기 배터리 화재 등 연이은 첨단제품 사고로 소비자 보호 강화 요구가 높아짐에 따라 22대 국회에 계류 중인 제조물책임법 개정안 8건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들 법안은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한 제품에서 결함 입증 책임을 소비자에서 제조사로 전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2022년 12월 발생한 강릉 급발진 의심 사고 이후 국민 안전과 권익, 산업계 부담 완화라는 쟁점이 정치권과 여론의 관심사로 부상하기도 했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1대 국회에서 폐기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은 지난 1월, 김해국제공항에서 이륙을 준비하던 에어부산 BX391편(홍콩행) 여객기에서 갑작스러운 화재가 발생해 승객 7명이 경상을 입고 항공기가 전소되는 사고로 이후 사회적 공감대를 다시 얻었다.
국토교통부 항공철도사고조사위원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사고 원인으로 기내에 반입된 보조배터리의 내부 합선을 지목하면서 제조사·수입업자·유통업자 등 책임 주체의 범위가 사회적 쟁점으로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 등 주요 대선 주자들은 AI·신산업 투자, 경제성장, 청년·미래세대 지원 등 현안에 집중할 뿐, 제조물책임법 개정에 대해서는 별다른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업계·법조계·학계에서는 “첨단제품 사고와 소비자 피해가 반복되는 현실에서 법 개정 논의가 선거 국면의 표심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두 후보는 AI·신산업 투자와 경제성장, 청년·미래세대 지원, 균형발전, 복지 강화 등 국회에서 법안 발의·심사·토론이 활발히 진행 중인 주요 현안에 대한 공약을 내세우고 있다.

전문가들은 제조물책임법의 실효성 강화와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반주일 상명대 교수는 “제조물책임법 개정은 수년째 사회적 논의는 활발하지만 대선 시기에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며 “자동차와 같이 복잡한(complex) 제조물에 대하여 특례조항을 두어 입증책임을 완화하는 방안이 논의되어야 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반 교수는 오는 6월 출간 예정 저서 ‘급발진을 파헤치다’를 인용하며 “소비자와 대기업 사이의 정보 비대칭 구조에서 피해자가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제조물 사고의 원인은 하드웨어·소프트웨어·전자제어 등 매우 다양하며, 소비자가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어렵다. 법리적·사후 보상 문제보다 공학적·선제적 조치와 입증책임 구조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동차처럼 첨단 과학 기술이 탑재되는 제조물에 대하여 제조물책임법상에서 ‘고난도(highly complex) 제조물’ 개념을 정의해 특례조항을 만들고 피해자 편에서 전혀 작동하지 않는 현행 제조물책임법 제3조의2를 보완해 주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필수 대림대 교수는 현행법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 꼬집었다.
김 교수는 “자동차와 같이 복잡하고 첨단 기술이 집약된 제품에 대해 소비자가 과학적으로 결함을 입증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미국식 디스커버리 제도처럼 제조사가 관련 자료를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하는 제도가 필요하단 목소리가 계속 외면받고 있다”고 말했다.
항공업계 관계자도 제조물책임법의 실효성이 이번 대선 국면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항공업계 관계자는 “항공기 배터리 사고는 PL(제조물책임)법의 실효성 강화와 제도적 보완 필요성을 보여줬다. 기내에서 배터리로 인한 사고가 또 발생 시 항공사와 승객 간의 민사 분쟁뿐 아니라, 배터리 제조사와 유통업체의 결함 책임이 향후 손해배상 소송의 핵심 쟁점이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어 “소비자 보호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제도적 보완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업계에서도 높은 상황”이라며 “첨단 제품 사고와 소비자 피해 사례는 제조물책임법 개정 논의의 당위성을 부각해 왔다”고 덧붙였다.
내년부터는 책임보험 미가입 완성차 업체에 보조금 지급을 제한하고, 충전사업자에도 무과실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는 방안이 시행된다.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기능 개선, 사고기록장치(EDR) 의무화 등도 병행된다. 제조물책임법 개정이 이뤄질 경우, 이러한 정책적 변화와 법률적 변화가 상호 보완적으로 작용할 전망이다.
하지만 강릉 급발진 의심사고 이후 발의된 제조물책임법 개정안인 ‘도현이법’은 5만명 이상의 동의를 얻었지만, 아직까지 정무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안 8건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