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가, 마녀가, 이랑이 나타났다 [쿠키인터뷰②]

이은호 / 기사승인 : 2021-09-16 06: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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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를 낸 가수 이랑.   유어썸머 제공.
[쿠키뉴스] 이은호 기자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 가수 이랑은 2016년 낸 정규 2집 타이틀곡 ‘신의 놀이’에서 이렇게 물었다. 최근 서울 망원동 작업실에서 만난 그에게 이 질문을 되돌려줬더니,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난 여성이 프리랜서 예술가로 살아가며 경험하고 듣고 상상한 이야기. 지난달 23일 나온 이랑의 정규 3집 ‘늑대가 나타났다’는 바로 그 이야기를 담고 있다.

Q. 음반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떤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2집이 명반’이라는 이야기도 있고(웃음), 내 의도를 파악하고 자기 언어로 풀어 써주신 분들이 많아서 좋다. 3집 가수의 이야기를 사람들이 계속 들어줄까 걱정했는데, 걱정한 것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들어주고 있어 기쁘다.”

Q. 경력이 쌓이면서 생긴 불안이 있었나보다.

“창작자로서 나의 새로운 이야기가 얼마나 울려 퍼질까 하는 고민은 늘 있다. 게다가 어떤 매체든 새 얼굴, 젊은 신예를 대대적으로 다루니 새로움을 찾는 입장에선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사람의 신작을 덜 재밌어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Q. 신보는 언제부터 작업했나.

“꾸준히 메모하고 수정하며 차근차근 만들었다. ‘어떤 이름을 가졌던 사람의 하루를 상상해본다’는 2016년에 아이디어를 처음 메모해둔 뒤 5년 넘게 작업했다. 음반에 실린 10곡은 프로듀서 이대봉과 함께 추린 노래들이다. 첫 곡인 ‘늑대가 나타났다’에 어울리는 곡들로 골랐다. ‘임진강’은 음반 분위기와 어우러지지 않아 지난 6월에 싱글로 냈고, 녹음까지 마쳤지만 음반에는 싣지 않은 곡도 있다.”

Q. 음반 소개에 “‘나의 이야기’에 집중했던 전작들과 달리. 다양한 목소리를 담는 것을 목표로 작업했다”고 적었다. 무슨 의미인가.

“단순하게 말하면 1·2집은 ‘나는’으로 시작하는 곡들이 많은 반면, 3집에선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노래들이 절반 정도다. 1집을 만들 땐 가족 외에 처음 꾸려나간 관계에서 생기는 질문들을 많이 생각했고, 2집에선 학생 신분을 벗고 마주한 사회에 골이 띵해져서 쓴 가사가 많다. 2집을 낸 후 ‘연대하면 살아갈 힘이 생긴다’는 사실을 새롭게 알았다. 그래서 이미 너무 많이 다쳐서 마음이 닫힌 사람들, 목소리를 낼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상상하며 가사를 썼다.”

‘늑대가 나타났다’ 음반 내지 그림은 이랑의 오랜 친구인 이자연 작가가 ‘환란의 세대’ 노래를 듣고 그렸다.   이은호 기자.   
Q. 2집 타이틀곡 ‘신의 놀이’가 온갖 집회에서 불리는 모습을 보며 ‘늑대가 나타났다’를 쓴 걸로 안다.

“시위 현장에서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었다. 국민적인 시위 현장에서 자기 곡으로 노래하는 가수들이 부러웠고, 한 소절만이라도 모두가 따라 부를 수 있는 곡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친구에게 실비아 페데리치가 쓴 ‘캘리번과 마녀’를 추천받아 읽다가, 중세시대 농민 운동을 묘사한 내용에 공감이 가서 그걸 노래로 썼다. 가사에 중세시대 느낌을 살린 이유는 우화로 표현해야 거부감이 덜할 거라고 판단해서다. ‘포도주’ ‘성문’ ‘빵’ ‘마녀’ 같은 단어를 쓰면 옛날이야기처럼 듣게 되는데, 그 이야기가 내가 경험한 불의와 연결될 때 더욱 폭발력을 가질 거라고 믿었다.”

Q. “이건 곧 당신의 일이 될 거랍니다”라는 가사에는 등골이 서늘했다.

“악담이나 저주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웃음) ‘마녀’ ‘폭도’ ‘이단’ ‘늑대’처럼 지배층이 일반 시민으로 하여금 운동(시위)을 나쁘게 인식하도록 사용한 이미지들이 있지 않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노동자나 여성들의 운동을 나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선 어떤 식으로든 권력에 의한 폭력이나 불의, 분노가 끓어오르는 일을 마주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 또한 많이 경험했고. ‘이건 당신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저들은 마녀·폭도·이단·늑대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겪은 억울한 일을 이야기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Q. 수록곡 ‘환란의 세대’에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는 가사가 나오는데, 또 다른 수록곡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선 죽어버리자는 얘기가 사랑 노래임을 친구들은 알 거라고 말한다.

“‘환란의 세대’가 죽음을 권유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내가 친구들에게 일순 멸망해버리자고 말하는 건 그들을 사랑해서다. 누군가가 홀로 떠나거나 일부가 재난으로 죽지 않길 바라서다. 나는 ‘환란의 세대’를 사랑 노래로 생각해서 만들었고, 그래서 ‘의식적으로 잠을 자야겠다’에 그런 가사를 썼다. ‘환란의 세대’가 아니더라도 내가 사랑 노래를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늑대가 나타났다’ 온라인 커버.   유어썸머 제공.
Q.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의 일에 슬퍼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나.

“내가 겪는 일을 나만 겪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내가 혼자가 아니라고 느낀다.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의 존재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행히 지금까지는 내 이야기를 전할 기회가 있었고 화답을 받기도 했다. 내 노래에 위로 받은 사람들이 다시 나를 위로해주는 데서 느끼는 연대감으로 살아가고 있다.”

Q. ‘신의 놀이’에서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계시나요”라고 묻는다. 당신은 이 질문에 뭐라고 답하겠나.

“20대엔 내가 남들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외국뽕’ ‘예술뽕’에 차 있어서 ‘내가 외국에서 태어났으면 훨씬 잘 됐을 텐데, 나는 가난해서 외국에 갈 수도 없어’라며 투덜대곤 했다.(웃음)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내가 처한 상황과 내가 겪은 일들을 얘기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신의 노래’에 나오는 질문을 만들었고, 그 질문으로 다른 사람들이 자기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들을 수 있어서 좋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 산다는 데 어떤 의미를 두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은 정확하게 안다. 외국 활동을 하면서 더 뼈저리게 알게 됐다. 나는 한국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는데, 외국에 가니 ‘이랑’이라는 이름 앞에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붙는다. 그래서 ‘국뽕’이 찰 때도, 혼란스러울 때도 있는데… 어쨌든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바뀔 수 없는 사실에서 이야기가 출발하는 것 같다.”

wild37@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