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명의 남자가 주방에 모인다. 박한빈(25·가명)씨가 주도해 저녁 식사 메뉴를 정한다. 박씨가 지금 우리가 쓸 수 있는 식재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 “상추”, “고기”, “북어”라는 답이 돌아온다. 다시 박씨가 “상추 무침, 고기볶음, 북엇국을 하면 되겠다”고 말하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인다. 박씨가 역할 분배를 시작했다. “찬장에서 북어를 꺼내. 냄비 안에 물이랑 북어를 넣고 불려둬”와 같이 구체적인 내용으로 다른 사람에게 할 일을 지시한다.
과거 주방 근무 경험이 많은 박씨는 공유 주방에서 주로 메인 셰프 역할을 맡는다. “천천히 하자”란 말로 저녁 요리가 시작된다. 다른 사람에게 맡긴 일은 두어 번 반복해서 말하기도 한다. 이곳에선 식재료를 흘리거나, 가위를 떨어뜨리는 등의 실수가 있어도 타박하는 사람이 없다. 서로의 배려 속에서 ‘우리집(WooRi Hoom)’의 저녁밥이 만들어진다.
우리집은 비영리기관 ‘씨앗티움공동체’에서 운영하는 느린 학습자·자립 청년 사회주택이다. 경계선 지능인이거나, 경도 지적장애인에 해당하는 자립 준비 청년들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다.
경계선 지능인은 지능지수(IQ) 전체 평균인 100점을 기준으로 IQ 71점~84점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IQ가 70 이하면 지적장애, 85 이상이면 비장애에 해당한다. 지적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걸쳐져 있어 경계선 지능이란 의학 명칭이 붙었다. 최근엔 ‘배우는 게 느린 사람’이란 뜻의 순화어인 ‘느린 학습자’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박씨는 우리집에 입소하기 전까지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인 줄 몰랐다고 밝혔다. 박씨는 경계선 지능인 당사자가 아닌 생활지도사로 우리집에 처음 입소했다. 우리집 생활 도중 문제를 느껴 IQ 검사를 해보게 됐고, 그 결과 83의 수치가 나왔다.
어떤 문제를 느꼈냐고 질문하자, 박씨는 “창틀에 곰팡이가 생기면 이를 닦아야 한다거나, 음식물쓰레기를 언제 버려야 하는지 등의 생활 수칙을 잘 몰랐다”고 답했다. 인간관계의 문제도 있었다. 박씨는 “제 의견을 잘 말하지 못했다. 또 기침할 땐 사람이 없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암묵적인 매너를 숙지하는 것도 어려웠다”고 덧붙였다.
박씨는 경계선 지능인으로서 다시 우리집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가족이 아닌 타인과 함께 생활한다. 배려하고 소통한다. 자기 생활에 필요한 일은 스스로 한다. 그렇게 박씨는 자신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천천히 배워나갔다. 박씨는 다 함께 만드는 저녁 식사 또한 그런 훈련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우리집에서 생활하는 또 다른 경계선 지능인 당사자 김연우(29·가명)씨 또한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김씨는 자신이 “물건 좀 자주 잃어버리고, 남들 앞에서 긴장 많이 하는 사람”일 뿐인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우울 장애 문제로 심리 상담을 받던 중 IQ 검사를 진행했고, 그 결과 자신이 경계선 지능인임을 알게 됐다.
김씨는 현재 한 장애인 일자리 창출 카페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김씨는 자신의 직장 생활 중 이 카페에서 근무한 기간이 가장 오래됐다고 밝혔다. 23년 7월에 입사하여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으니 1년 반이 조금 넘는 셈이다. 그전엔 자잘한 실수를 반복하거나 일 처리가 느린 까닭에 1년을 채우지 못하고 직장에서 해고당하기 일쑤였다. 상사로부터 “다음부턴 실수하지 마라”는 말을 들어도, 언제 같은 실수를 저지를지 김 씨 자신도 예상할 수 없어 항상 긴장한 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이전 직장과 비교했을 때 어떤 장점이 있느냐고 묻자, 김씨가 “마음이 편하다”고 답했다. 일 처리를 빨리해야 한다는 강박이 적기 때문이다. 방문객 또한 카페 직원의 사정을 알고 오는 경우가 많다. 손님이 먼저 “천천히 하라”고 일러주기도 한다. 김씨는 조금 느리게 흘러가는 카페에서 가슴 펴고 웃을 수 있게 됐다. 근무 태도가 좋다 보니 단골손님도 생겼다. 커피의 종류도 모르고 살았건만,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석 달 동안 공부해 바리스타 1급 자격증을 땄다.
경계선 지능인인 이보경(25·가명)씨도 “직장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 일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사회복지센터에서 근무 중이다. 직장 동료들도 이씨와 비슷한 느린 학습자다.
이씨는 “느리다는 이유로 가정이나 전 직장에서 마찰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서로의 입장을 이해해주고 도와주며 일을 한다. 내가 실수해도 괜찮다는 답이 돌아오고, 나 또한 동료에게 그렇게 한다”며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낼 수 있다는 기분을 느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