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프닝 상황입니다. 오정아 선수가 승자 인터뷰를 한다면 굉장히 민망해 할 것 같습니다.” (송규상 해설자) “여러분, 이해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저희는 (AI를 통해) 결과를 알고 보고 있으니까 보기가 편한데…” (김여원 캐스터)
4년 만에 오정아-최정 리턴 매치로 열린 기업은행배 결승에서 이변이 연출됐다. 한국 바둑 랭킹 208위 오정아 5단이 32위 최정 9단을 격파하고 기선을 제압했다. 마지막 순간에 패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된 탓에 끝까지 승부를 확신하지 못한 두 선수는 계가를 마친 이후 희비가 엇갈리는 모습을 보였다.
오정아 5단은 30일 오후 7시 서울 성동구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열린 2025 IBK기업은행배 결승 3번기 제1국에서 최정 9단에게 313수까지 가는 혈투 끝에 백으로 반집을 남겼다. 전 세계 모든 스포츠 중 끝나는 순간까지 누가 이겼는지 모를 가능성이 있는 스포츠는 바둑이 유일한데, 이날 오정아 5단은 공배를 메우는 순간까지 이마에 손을 짚고 차마 착점하지 못하고 뜸을 들이는 등 마치 역전패를 당한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였다.
이날 한국기원이 운영하는 바둑TV에서 생중계를 진행한 프로기사 송규상 7단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해프닝”이라고 단언했고, 김여원 캐스터 역시 대국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연신 시청자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상황이 연출됐다.
국후 인터뷰에 나선 오정아 5단은 “마지막에 패를 하지 않고 먹여쳐서 끝내기 했으면 이긴 것 같은데, 바꿔치기 돼서 졌다고 생각했다”면서 “너무 꼬장을 많이 부렸다. 조금 미안하다. 당연히 진 줄 알았다”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이어 “마지막에 계가를 할 때 상대가 마지막 공배를 메우길래 ‘1집반 정도 졌나보다’ 생각했다”면서 “너무 아쉬워서 속이 터질 것 같았는데, 갑자기 14집이 남아서(상대 집 20집, 반집승) 진짜 깜짝 놀랐다”고 털어놨다.


김여원 캐스터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많은 분들께서 오해를 하셨을 텐데 시청자분들에게 사과를 해야 될 것 같다”고 제안했고, 이에 오정아 5단은 “정말 죄송하다. 너무 프로답지 못하게 제 감정에 치우쳤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정말 너무 아쉬운 마음에 계속 그런 안 좋은 리액션이 나왔던 점 이해 부탁드린다”고 사과했다.
한편 지난 16일 준결승을 먼저 치르면서 일찌감치 결승에 선착한 오정아는 “여자바둑리그 시즌이기도 하고 다른 시합 두면서 평소처럼 준비했다”면서 “준결승 두 선수(최정-김채영)가 두는 것을 보면서 상대에 대한 준비도 했다”고 말했다.
이영구 9단과 ‘부부 프로기사’인 오정아 5단은 “남편이 바둑 기술에 대해 알려주거나 그런 건 많이 없다”면서도 “아이를 전적으로 케어하면서 저에게 공부할 시간을 주는 방식으로 내조해줬던 것 같다”고 말했다.
오정아 5단은 2023년 여자 국가대표팀 코치를 역임한 바 있다. 당시 오정아 코치는 끝내기 교재를 만들어서 선수들과 함께 연구를 진행하기도 했다. 이날 대국에서 끝내기에 역전한 흐름이었기 때문에 김여원 캐스터는 당시 경험이 도움이 됐는지 물었고, 그러자 오정아 5단은 “제가 끝내기 모양을 만들어서 몇 집 끝내기인지 문제를 푸는 방식으로 공부했다”면서 “같이 계산은 거의 안 했기 때문에 그게 도움이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오늘 운이 좋았던 것 같다”는 소감을 전했다.
우승까지 단 1승을 남긴 오정아는 “아직 갈 길이 멀다”면서 “3번기이기 때문에 우승 못하면 오늘 승리는 크게 의미 없다”고 각오를 다졌다. “4년 전(최정 9단과 결승전) 영상을 다시 봤는데, 그때는 제가 인상을 쓰면서 두고 있고 내용적으로도 아쉬움이 많이 남았는데, 이번에는 한 판 이겼으니까 일단 출발은 좋다고 생각한다”면서 “남은 대국도 준비를 잘해서 이번에는 꼭 우승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오정아와 최정, 두 기사는 2021년 이 대회 첫 결승에서 한 번 맞붙은 바 있다. 당시 최정 9단이 2-0으로 완승하며 초대 챔피언에 올랐다. 결승 1국을 오정아 5단이 먼저 가져가면서 상대 전적 격차는 오 5단 기준 6승18패로 다소 줄었다. 여자 랭킹에선 오정아 5단이 10위, 최정 9단은 1위다.
2021년 창설돼 다섯 번째 대회를 맞은 IBK기업은행배는 올해 상금을 대폭 인상했다. 우승 상금은 3000만원에서 국내 여자 개인전 최고 수준인 5000만원으로, 준우승 상금은 1200만원에서 2000만원으로 상향했다.
그동안 열린 네 번의 대회에서는 최정 9단이 두 차례(1·3기), 정유진 4단(2기), 김채영 9단(4기)이 한 차례씩 우승을 차지했다. 2025 IBK기업은행배 여자바둑 마스터스는 IBK기업은행이 후원하고 한국기원이 주최·주관한다. 제한시간은 시간누적(피셔) 방식으로 각자 40분, 추가시간 20초로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