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시대가 되다 [열다섯, 소녀시대①]

기사승인 2022-08-06 06: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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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 시대가 되다 [열다섯, 소녀시대①]
JTBC ‘소시탐탐’에서 완전체로 모인 그룹 소녀시대. JTBC 유튜브 캡처

그룹 소녀시대 여덟 멤버가 데뷔 15주년을 기념한 JTBC 리얼리티 프로그램 ‘소시탐탐’ 기획 회의를 하러 모인 날, 리더인 태연은 제안했다. “데뷔 초와는 다를 거 아냐, 우리가. 지금의 우리는 어떨지 (보여주자).” 태연의 말에 티파니는 “지금의 소녀시대, 낫(Not) 예전의 소녀시대”라고 호응했다. 이들은 처음 떠난 우정여행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연신 “각자 조금씩 달라졌다고 느꼈다”고 했다. 어떤 의미였을까.

“시간이 흐른 만큼 멤버들 모두 성숙했다고 느꼈어요.” 5일 서울 삼성동 인터컨티넨탈 서울 코엑스에서 만난 태연은 이렇게 설명했다. 각자 개인 활동을 하면서 더 큰 책임감을 견뎌내는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다. 수영은 “한 울타리(SM엔터테인먼트)에 있을 땐 멤버들끼리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지금은 멤버 모두 개인 활동에 집중하니까 한 번 모이는 시간이 무척 소중하다”며 “(자신의 활동을) 홀로 책임지며 5년을 보냈더니 모두들 책임감이 커졌다”고 말했다.

소녀, 시대가 되다 [열다섯, 소녀시대①]
MBC ‘쇼! 음악중심’에서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 무대를 꾸민 소녀시대. MBC 유튜브 캡처

판타지 속 소녀들, 현실 속 그들이 되다

초창기 소녀시대는 ‘소녀’에 투영된 판타지를 집약한 팀이었다. 데뷔곡 ‘다시 만난 세계’가 보여주던 씩씩하고 진취적인 소녀상은 ‘지’(Gee)를 거쳐 수줍지만 발랄한 소녀로 돌아갔고, ‘오’(Oh!)에서는 먼저 사랑을 고백할 만큼 당차고 성숙한 소녀로 이어졌다. 쇼윈도에 전시된 마네킹(‘지’ 뮤직비디오)처럼 표준화된 신체, 곧고 가느다란 다리를 강조한 제기차기 춤(‘소원을 말해봐’), 좋아하는 ‘오빠’와 대비해 스스로를 연약하고 보호받는 자리에 두는 가사(‘오’) 등 쇼 비즈니스 산업이 어린 여성에게 기대하는 이미지가 곳곳에서 묻어났다.

당연하게도 소녀는 영원히 어리지 않다. 소녀시대는 노골적인 남성향 판타지로 기획된 ‘소원을 말해봐’에서도 힘찬 구호와 기합을 불어 넣으며 에너지를 분출했다. 데뷔 5년차를 넘어서는 ‘더 보이즈’(The Boys), ‘아이 갓 어 보이’(I Got A Boy) 등으로 당당한 여성상도 보여줬다. 개인 활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면의 불씨를 태우라며 듣는 이에게 용기를 불어넣고(태연 ‘불티’), 난 바비 인형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자의식을 드러냈다(티파니 ‘낫 바비’). 스크린에서는 성 범죄자를 추격하는 천재 해커 경찰관(수영·영화 ‘걸캅스’)이나 재난 속에서도 의협심을 잃지 않는 웨딩홀 부지점장(윤아·영화 ‘엑시트’)이 되기도 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가요 관계자는 “여러 분야에서 개인 활동을 펼치며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 소녀시대 브랜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줬다”고 평가했다.

소녀, 시대가 되다 [열다섯, 소녀시대①]
정규 7집 발매 기념 기자회견에 참석한 소녀시대.   사진=임형택 기자

야만의 시대 뚫고…“앞으로도 소녀시대”

소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소녀시대의 발자취는 K팝 걸그룹이 나아갈 길을 넓히는 이정표가 됐다. 이들은 네 차례에 걸쳐 아시아 전역을 돌며 공연하고, 일본에서 ‘꿈의 무대’로 불리는 도쿄돔을 비롯한 대형 공연장 투어를 이어가며 ‘팬덤형 걸그룹’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음반 판매량도 보이그룹 못지않게 높았다. 오리콘에 따르면 소녀시대는 2012년 일본에서 음반·DVD 판매로만 43억3200만엔(약 555억)을 벌어들였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K팝 가수 중 가장 높은 매출액이었다. 같은 해 소녀시대-태티서가 내놓은 미니 1집은 미국 빌보드 메인 음반 차트에 126위로 진입했다. 당시 K팝 최고 순위였다. 소녀시대가 증명한 걸그룹의 글로벌 시장 공략 가능성은 레드벨벳, 블랙핑크, 트와이스 등 3·4세대 대형 걸그룹이 탄생할 산업적 토대가 됐다.

음악에 있어서도 소녀시대는 도전과 혁신을 지향했다. 빌보드가 2019년 ‘지난 10년을 정의하는 노래 100곡’ 중 하나로 꼽은 ‘아이 갓 어 보이’가 대표적이다. 빌보드는 이 곡을 두고 “미래 음악 산업이 지행해야 할 지표”라며 “21세기 음악적 실험주의의 한계를 더욱 확장했다”고 평가했다. 소녀시대는 5일 내놓은 신보에도 악당의 정의를 새롭게 해석한 ‘빌런’(Villain), 히트곡 ‘런 데빌 런’(Run Devil Run)과 연결되는 ‘유 베러 런’(You better Run) 등을 수록해 음악적 모험을 이어갔다. ‘빌런’ 작사·작곡·프로듀싱에 참여한 티파니는 “이전과 다른 보컬 퍼포먼스를 담아보려 했다”면서 “다양한 음악으로 음반을 구성했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에게) ‘소녀’라는 단어, 이제 그만 쓰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티파니가 SBS ‘강심장’에서 이렇게 털어놨던 때 소녀시대 멤버들의 평균 나이는 고작 24.5세였다. 한 언론사는 티파니의 이 발언을 기사화하면서 “알고 보니 ‘소녀’ 실종… ‘줌마시대’ 나올 기세”라는 제목을 붙이기까지 했다. ‘30대 걸그룹’을 기대하지 못한 빈약한 상상력과 여성의 가치를 나이에서 찾는 여성 혐오가 동시에 작동한 결과였다. 결국 소녀시대는 야만의 시대를 견뎌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 시대를 상징하는 얼굴이 됐다. “지금은 소녀시대, 앞으로도 소녀시대”라는 구호를 다짐으로, 약속으로, 현실로 만들면서.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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