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키 정치] 최근 태국 골프 파동으로 혼쭐이 난 민주당의 한 재선의원은 16일 “국민정서법의 1호가 골프에 대한 반감인데, 그만 방심하고 말았다”며 “충격이 너무 커 올해는 골프장에 얼씬도 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고 털어놨다.
정치권과 공직사회에서 잊을만하면 터지는 게 골프 파문이다. 부적절한 시기에 골프를 했다가 정치적 위상이 휘청거리거나 옷을 벗는 정치인과 공직자들이 적지않다. 골프를 안치겠다는 ‘NGO(노 골프) 국회의원 모임’이 생겨나고, 공직사회에 수시로 골프 금지령이 내려지는 것도 우리 사회의 씁씁한 자화상이다.
그러나 과거 정치인들은 정치적 위기 때 중요한 합의를 이끌어내거나 첨예한 갈등을 풀어내는 대화의 장으로 골프를 활용해왔다. 지나치지만 않다면 골프보다 더 좋은 운동이 없다는 게 정치인 골프애호가들의 공통된 얘기다.
정치인들에게 골프란
한나라당 김용갑 전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나도 쳐봤지만 골프는 마약같다. 정치인의 본분까지 잃어버리게 만든다”고 말했다. 강재섭 전 대표도 “정치인들이 조심해야 할 3가지가 골프와 폭탄주, Y담(음담패설)”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정치인에게 골프는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인 운동이다. 17대 국회 때 골프를 가장 멀리할 것 같았던 대표적 386 운동권 출신 한 초선 의원 역시 “골프에 푹 빠져 지낸다더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정치권에서 1970·80년대식 ‘요정 정치’가 막을 내린 뒤 ‘필드 정치’가 유행하게 된 것은 건강을 중요시하는 사회 풍조 때문이란 분석도 나온다. 민주당의 한 초선 의원은 “원로 선배들은 과거 ‘도청’ 때문에 골프장을 자주 찾았다지만, 요즘은 거친 정치판에서 생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차원에서 골프장을 찾는다”고 말했다.
여전한 접대 문화도 골프 확산의 한 요인이다. 한 초선 의원은 “소속 상임위 산하기관 사람들의 첫 마디가 ‘운동(골프) 한번 하시죠’라는 말”이라고 말했다. 일부 대기업들은 정치인들의 ‘부킹 민원’은 적극 들어주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각에선 “골프를 못하면 당내 계파 모임에 끼기 어렵고 왕따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골프를 해야 한다”며 계파 정치를 탓하기도 한다.
정치에 약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우리 정치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에는 골프 회동이 불씨가 된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게 3당 합당이다. 1989년 10월 당시 야당이던 김영삼(YS) 통일민주당 총재와 김종필(JP)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안양CC(현 안양베네스트)에서 회동을 갖고 여당이던 민주정의당과 합당키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사안의 심각성 때문인듯 정규 18홀에 9홀을 추가로 돌면서 장시간 얘기를 나눴다. 이날 합의가 바탕이 돼 YS는 2년 뒤 대통령이 됐다.
97년 대선에서 김대중(DJ) 국민회의 총재와 JP가 DJP연합을 이룬 것도 골프장 회동이 신호탄이 됐다. 대선 1년 전인 96년 12월 자민련 총재이던 JP는 광주를 전격 방문, DJ측 인사들과 어울려 골프를 쳤다. 회동 직후 양당은 이듬해 지자체 선거에서 선거공조를 하겠다고 발표했고 몇 개월 뒤 대선에서 DJP연합 정권이 창출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당시 당내에 우군이 없었던 2001년 11월, 이해찬 전 총리와 유인태 전 의원 원혜영 당시 부천시장과 골프회동을 했다. 이들은 골프회동 이후 확고한 지지자로 돌아섰다.
그러나 골프 회동이 언제나 좋은 결과만 도출했던 건 아니다. 2000년 7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 총재와의 만남이 그렇다. 두 사람은 이날 골프를 치려다 비가 오는 바람에 클럽하우스에서 밥만 간단히 먹었다. 이 자리에서 JP는 이 총재에게 17석인 자민련이 교섭단체가 될 수 있도록 국회법을 개정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총재는 거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JP는 2년 뒤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돕지 않았고, 결국 이 총재는 고배를 마셨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비만 안왔어도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얘기들이 많았다.
개인의 흥망을 좌지우지한 경우도 많았다. 참여정부 시절 책임총리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던 이해찬 전 총리가 2006년 3·1절 골프 파동으로 낙마했다. 같은해 7월에는 한나라당 홍문종 경기도당위원장 등이 수해 속에 골프를 쳐 파문을 일으켰다.국민일보 쿠키뉴스 손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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