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쿠키 정치] 빈농의 아들. 독학으로 사법고시 합격. 최루탄 연기 속 인권 운동가. 굴곡으로 점철된 국회의원 생활. 제16대 대통령 당선. 퇴임 1년여만에 검찰 출두. 평생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며 스스로 거친 삶과 ‘비주류’를 택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14줄짜리 유서를 남기고 홀연히 떠났다.
지난 23일 63세를 일기로 서거한 노 전 대통령은 평생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삶은 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았다. 때로는 악조건을 감내해 기적같은 승리를 쟁취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원칙’을 고수한 대가는 혹독했다. 이는 대통령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어쩌면, 투신 순간에도 비주류로서 더 엄격할 수 밖에 없었던 도덕적 잣대와 결벽증에서 마지막 줄타기를 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한 노무현=노 전 대통령은 1946년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해 공부를 잘했고, 재주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초등학교 때에는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을 정도로 리더십도 두드러졌다. 그러나 가난의 굴레로 힘든 젊은 시절을 보냈다. 부산상고에 진학한 것도 장학금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 좌절은 없었다. 75년 독학으로 사시에 합격해 2년 뒤 대전지법 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듬해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조세분야 전문 변호사로 활동했다. 권양숙 여사는 “가족이 가장 안락했던 때가 조세 변호사 시절이었던 것 같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그러나 ‘바보 노무현’은 81년 부산지역 민주 인사 탄압사건인 부림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부산의 대표적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87년에는 고 박종철 군 추도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연행되기도 했다. 6·10 항쟁 이후에도 그는 대우조선의 3자 개입 혐의로 구속되는 등 노동운동에도 헌신했다.
◇부침이 끊이지 않았던 정치인 시절=노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88년 통일민주당 후보로 부산에서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당시 5공 실세인 허삼수씨를 꺾어 화제가 됐다. 그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같은 해 열린 국회 5공 비리 조사특위 청문회에서였다. 당시 송곳 질문으로 정주영 전 현대 회장 등을 궁지로 몰았다. 이를 계기로 ‘청문회 스타’라는 별명이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는 비주류의 길을 선택했다. 90년 3당 합당에 반발해 민자당행을 포기했다. 여당 합류를 거부한 ‘괘씸죄’는 92년 14대 총선과 95년 부산시장 선거, 96년 15대 총선까지 줄줄이 낙선으로 돌아왔다.
노 전 대통령은 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했다. 영남 출신 정치인이 호남 기반 당에 입당하는 것은 당시로선 파격이었다. 당에서 여전히 비주류였지만, 그는 뚜렷한 정치적 소신을 무기로 마침내 2002년 16대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
재임시절도 평탄치 않아 그는 대통령이 돼서도 ‘노무현 스타일’을 고집했고 정적들과 싸워야 했다. 취임 1년 뒤에는 국회의 탄핵소추로 2개월간 직무가 정지되기도 했다.
◇귀향과 굴절많은 퇴임 이후=그는 퇴임해서는 홈페이지를 운영하며 정치적 조언을 하거나, 환경·생태 운동을 벌이는 등 나름의 활동영역을 구축했다. 그러나 지난해 청와대 기록물 유출 사건에 이어 박연차 사건으로 검찰수사를 받으면서 위기에 몰렸다. 특히 검찰 수사가 본격화된 뒤에는 인터넷에 글을 띄워 적극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등 특유의 승부사적 기질도 내비쳤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장기화되면서 ‘방어’를 포기하고 역사 속으로 뛰어내렸다. 한 친노계 인사는 24일 “노 전 대통령은 언제나 당당한 정치인으로 살아가려 했다”며 “검찰 수사를 받고 앞으로 벌일 법정 다툼이 어쩌면 당신답지 않은 모습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손병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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