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LG배 파행’ 사태 겪은 한국기원, 바둑룰 전면 개정 나선다…7월1일부터 시행

[단독] ‘LG배 파행’ 사태 겪은 한국기원, 바둑룰 전면 개정 나선다…7월1일부터 시행

커제 사태 겪은 ‘사석룰’, 기존 ‘경고’에서 ‘주의’로 크게 완화
경고 시 벌점 2집에서 벌접 1집으로 패널티도 완화 조치 취해
이의 제기 규정 변경…기존 감독, 선수에서 향후 ‘선수만 가능’

기사승인 2025-05-11 06:00:10 업데이트 2025-05-11 09:26:16
쿠키뉴스에서 한국기원으로부터 입수한 바둑룰 개정안. 오는 7월1일부터 시행된다.

“대국 중에 이의가 있을 경우 다음 수를 두지 말고 바로 손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1990년대 중반 무렵 아마추어 바둑 대회에 나가면 ‘프로기사 심판’으로부터 대국 시작 전에 항상 들을 수 있는 멘트였다. 상대 대국자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일단 다음 수를 착점했다면 ‘인정’하고 대국을 이어간 것으로 ‘간주’ 하므로, 즉시 대국을 멈추고 손을 들어 의사표시를 하라는 의미였다.

‘LG배 파행’ 사태를 불러온 한국 바둑룰이 다시 30여년 전 ‘관례’대로 회귀했다. ‘상임 심판’에게 이른바 ‘적극 개입’ 권한을 주면서 기존 바둑에서 찾아볼 수 없던 ‘반칙패’가 속출했던 상황. 개정된 바둑룰에서는 ‘원래대로’ 선수 본인만 이의 제기가 가능하도록 아예 문구가 새겨졌다.

11일 쿠키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한국기원은 지난 4월 운영위원회를 비밀리에 개최하고 논란이 됐던 바둑룰을 대거 개정했다. 이번에 개정된 한국 바둑 경기 규정은 오는 7월1일부터 시행되며, 중국 커제 9단의 강한 항의에 부딪혔던 ‘사석(死石)’ 룰은 1년 적용 유예 기간까지 둔다.

이와 관련해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바둑 경기 규정 개정안이 4월24일 개최된 운영위원회에서 안건으로 상정돼 통과됐다”면서 “이에 본원은 7월1일부터 본 규정을 시행 예정”이라고 밝혔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사석을 통의 뚜껑에 보관하지 않는 경우’에 관한 조치가 당초 ‘경고(기존 벌점 2집)’에서 개정안에서는 ‘주의’로 변경됐다. 아울러 조혜연 9단 등 다수의 프로기사들이 제기했던 의문을 이번 개정안 문구에도 반영, ‘사석이 통 뚜껑에서 넘치는 경우, 상대 선수가 볼 수 있도록 뚜껑 주변에 보관할 수 있다’는 내용도 신설했다.

‘착점 중 돌을 밀면서 두는 경우’와 관련된 규정도 크게 개정됐다. 먼저, 경고와 함께 벌점 2집이 부여됐던 이 룰은 ‘주의’로 이동됐다. 아울러 기존에는 ‘한 칸 이상 밀면서 두는 경우’에 경고를 받았지만, 개정 후에는 ‘두 칸 이상 밀면서 두는 경우’에 주의 조치를 받는다. 벌점을 부여받고 이후 반칙패 위험까지 발생하는 ‘경고’와 달리, ‘주의’ 조치는 대국에 직접적인 영향은 미치지 않는다.

경고 시 벌점이 2집에서 1집으로 줄어든 점도 눈에 띈다. LG배 2국 당시, 커제가 첫 번째 경고를 받고 사석 2개를 변상일 9단에게 패널티로 빼앗긴 장면이 생중계를 통해 전파를 탔다. 이와 관련해서도 2집이 과하다는 의견이 대세를 이루면서 1집이 줄어든 ‘벌점 1집’으로 개정됐다.

이의 제기를 감독이 아닌 ‘선수만’ 할 수 있도록 개정된 규정안에 문구로 못 박은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는 이번 시즌 바둑리그에서 수려한합천 지휘봉을 잡은 고근태 감독이 각종 규정 위반에 대해 여러 차례 이의를 제기한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합천 박하민 9단과 전주 백홍석 9단 대결에서 대국이 한참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김기용 심판이 개입해 백 9단에게 경고와 벌점 2집을 부여한 사례가 있다.

당시 대국이 중단되고 바둑판을 ‘검은 덮개’로 가리고 판정 절차가 시작되자, 당사자인 백홍석 9단과 박하민 9단은 ‘왜 대국이 갑자기 중단된 것인지’를 두고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바둑TV 생중계를 통해 팬들에게 보여지기도 했다. 당시 고근태 감독 측 선수인 박하민 9단도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젓기도 했다. 한편 백홍석 9단은 이후 비슷한 상황에서 또 경고와 벌점 2집을 받자 해당 대국을 즉시 포기하기도 했다.

개정된 규정에서 선수만 항의가 가능하도록 명시되면서 과거 바둑계 관례로 여겨진 ‘대국자가 즉시 이의 제기’하는 방식으로 다시 회귀했다. 한국기원은 행위 발생 즉시 이의 제기를 해야 한다면서 시간을 5분 이내로 규정했다. 이에 따라, 대국자가 직접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상황이라면 외부 개입으로 대국이 중단될 가능성은 크게 낮아졌다.

한편 한국기원 ‘상임 심판 제도’는 지난 2023년 4월 시행돼 이제 2년을 넘겼다. LG배 당시 심판을 맡았던 유재성(2국), 손근기(3국) 심판은 모두 ‘상임 심판’으로, 한국기원은 쿠키뉴스에 상임 심판이 공식 대회에 참가할 수 없도록 하는 한편 교육을 통해 전문성을 가진 심판을 채용했다는 입장을 전한 바 있다.

손근기 심판은 쿠키뉴스에서 지난 3월7일 단독 보도한 ‘[단독] 손근기 심판 ‘오심’ 인정…한국기원, 징계 논의 착수’ 기사 이후 심판위원회(김성래 심판위원장) 징계 논의 중이었으나, 자발적으로 사퇴를 하면서 별다른 조치는 받지 않았다. 당시 오심도 역시 바둑리그(마한의 심장 영암-영림프라임창호 전)에서 나온 바 있다. 

손근기 심판에게 삿대질을 하면서 격렬하게 항의하는 중국 커제 9단. 쿠키뉴스 자료사진

한국기원이 바둑룰을 전면 개정하게 된 이번 사태는 지난 1월22일 열린 제29회 LG배 결승 2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결승 1국에서 기선을 제압하면서 우승까지 단 1승을 남긴 중국 커제 9단은 2국에서도 초반부터 큰 우세를 잡았다. 하지만 한국에만 존재하는 ‘사석(死石·따낸 돌)’ 관리 규정에 의해 경고 1회와 벌점 2집을 받은 데 이어, 잠시 후 다시 같은 규정 위반으로 ‘반칙패’를 당했다.

1-1 상황에서 펼친 결승 3국은 반대로 변상일 9단이 유리한 흐름이었다. 커제 9단의 패배가 결정적인 국면에서 초·중반 사석 관리를 제대로 하고 있던 커제 9단이 연속해서 따낸 돌을 아무렇게나 던지는 행위를 반복했고, 심판이 개입해 경고 1회와 벌점 2집을 부여했다. 

커제 9단은 심판 판정에 불복해 크게 항의했다. 한국 손근기 심판에게 삿대질을 하며 언성을 높인 커제 9단은 결국 경기장을 떠나 돌아오지 않았고, 한국기원은 ‘기권패’를 선언했다. 변상일 9단 입장에선 불리한 국면에서 2국 ‘반칙승’, 반대로 3국은 필승지세 국면에서 ‘기권승’을 거두면서 우승을 한 셈이 됐고, 중국 바둑 팬들은 변 9단의 우승을 조롱하는 ‘밈’을 만드는 등 감정 싸움으로 번졌다.

쿠키뉴스가 지난 2월5일 단독 보도한 ‘[단독] ‘LG배 사태’ 의견 낸 신진서 “3국은 커제 잘못도 크다” [쿠키인터뷰]’ 기사가 중국 주요 언론에 번역돼 실렸고, 이후 중국 바둑 팬들의 의견은 둘로 갈렸다. 여전히 커제 9단을 옹호하는 의견도 적지 않지만, ‘세계 일인자’ 신진서 9단의 의견대로 3국을 두다 말고 항의를 하다 대국장을 이탈한 커제 9단의 행동 역시 잘못이라는 견해도 힘을 받았다.

중국 커제 9단이 LG배 직후 한국 주최 ‘풀리그 대회’인 쏘팔코사놀배에 불참하며 경색 국면을 보였던 양국 관계는 최근 다시 교류를 이어가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제30회 LG배에서 중국 선수단 전원(7명)이 불참을 통보하는 등 사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점이 최근에 수면 위로 다시 드러나면서 이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지 한국기원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LG배에서 ‘역대 우승자 초청’이라는 고육지책을 쓴 한국기원으로서는 당장 중국 바둑리그 출전 불가 조치 또한 풀어야 할 난제다. 중국은 표면적으로 ‘해외 용병 출전 불가’라고 공지했다. 하지만 일본 용병은 한국에 비해 출전 기사 숫자가 미미했고, 대만 용병은 여전히 출전(중국은 대만을 해외로 보지 않는다) 한다는 점에서 한국을 타깃으로 한 조치라는 게 바둑계 중론이다. 바둑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한국 프로기사들이 중국 바둑리그(갑조리그, 을조리그, 여자리그 등)에 용병으로 출전하면서 매년 약 15억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고 있었다”면서 “LG배 사태 이후 올해 한국 선수들의 중국리그 진출이 좌절됐는데, 이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이영재 기자
youngjae@kukinews.com
이영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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