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81)

[인문학으로의 초대] 최금희의 그림 읽기(81)

콘스터블의 <스토어 강의 풍경>은 왜 <백마>가 되었나?

기사승인 2025-08-11 10:02:55 업데이트 2025-08-12 16:56:01
존 콘스터블, 백마, 1819, 캔버스에 유채, 131.4x188.3cm, 뉴욕 프릭 컬렉션

존 콘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은 19세기 영국의 풍경 화가로, 프랑스에 간 적도 없고 “살아있는 한 프랑스에 가고 싶지 않다” 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살롱에서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받은 적도 있고, 들라크루아는 그를 “프랑스 풍경화의 아버지”라 극찬했다. 그는 평생 영국 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다니엘 가드너(Daniel Gardner), 존 콘스터블의 초상, 1796, 옥스포드 대학교 소머스 칼리지 출처: 위키백과

다니엘 가드너가 그린 초상화는 20살의 콘스터블이다. 그는 아주 잘 생긴 미남이며 꽤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옥수수를 런던으로 운반하는 운송업체를 운영했으며, 지적장애를 가진 형 대신 콘스터블이 가업을 이어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콘스터블은 화가가 되기를 원했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동생 에브함이 가업을 이어 받았다. 그의 집안은 플랫포드와 데담 수문을 소유하고 관리했는데, 이 수문은 수위를 조절하거나 거룻배가 더 쉽게 이동하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영국을 강타한 경제 불황은 콘스터블 가의 제분 사업에도 타격을 주었다. 형제 간의 편지에는 에브함이 존에게 가족의 재정을 위해 지금 당장 돈을 벌라고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콘스터블에게 있어 그림은 단순한 예술이 아니었다. 영국 시골의 고요하고 소박한 자연미를 화면 위에 정직하게 옮기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 믿었다.

1819년, 그는 대표작인 <백마The White Horse>를 왕립 아카데미 전시에 출품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년 만인 44살에 준회원이 되었다. 동시대의 또 다른 거장 터너가 24세의 젊은 나이에 회원이 되었던 것과 비교하면 이 늦은 성과는 그에게 더욱 눈물겨운 일이었다.

<백마>는 그가 태어나고 자란 스토아 강(Stour River)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이후 여섯 점의 연작으로 이어졌다. 그는 기존 화가들이 했던 소규모 스케치에 의존하는 방식을 넘어서, 실제 크기의 유화 스케치를 시도하는 전례 없는 실험정신을 발휘했다. 지금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전시된 이 대형 스케치는, 느슨하지만 생생한 붓터치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처럼 자연을 감각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콘스터블은 풍경화가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존 컨스터블, 백마, 1818~19, 캔버스에 유채, 워싱턴 국립 미술관

캔버스의 크기를 의미하는 '6피트(약 183cm)'로 유화 스케치를 그리는 과정은 원작과 같은 버전을 만드는 수고가 드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몇 개월이 소요되는 이런 유화스케치는 그를 거의 파산할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제대로 구성된 완벽한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캔버스가 크다고 작품이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작품들이 한꺼번에 전시되는 아카데미나 살롱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는 중요한 요소였다.  

<백마>는 액자 없이 캔버스인 채 100기니로 친구인 존 피셔 주교에게 팔렸고, 콘스터블은 비로소 경제적인 안정을 얻었다. 그는 1835년 피셔가 빚을 지게 되자 100기니로 <백마>를 다시 사들일 만큼 애착이 가는 작품이었다. 

<백마> 부분

그럼 <백마>는 어떤 점이 다른 작품보다 뛰어난 지 살펴보자. 콘스터블의 대표작 <백마>는 단순한 풍경화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고 자란 스토아 강유역의 기억과 감각, 그리고 예술적 상상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시각적 선언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실제로 존재하는 장소다. 지금도 스토아 강 오른쪽 강둑에 서면, 강 건너 흰 벽의 플랫포드(Flatford)의 별장이 보인다. 이 집은 당시 농부였던 월리 로트(Willy Lott)의 이름을 따서 불린다. 현재는 영국 내셔널 트러스트 1등급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어 방문도 가능하다.

그림의 왼쪽 아래에는 스퐁(Spong)이라 불리는 덤불이 무성한 작은 섬이 있고, 그 뒤로는 짚으로 엮은 소박한 보트하우스가 자리한다. 그 너머에는 월터 기븐스(Walter Gibbons)라는 나무에 가려진 농장이 있고, 그곳의 작은 마당에는 세 마리의 소가 한가롭게 물에서 놀고 있다. 이 모든 요소는 콘스터블이 수백 장의 스케치를 통해 관찰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백마>의 기초가 된 스케치와 월리 로트의 집은 1814년 스케치북에 담겨 있으며, 현재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콘스터블은 보이는 그대로의 풍경을 단순히 그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회화적 진실을 위해 과감한 재구성을 시도했다. 나무의 위치를 옮기고, 건물의 형태를 조정하며, 강의 폭을 넓히는 등 장면을 재배열했다. 그 결과, 관람자는 실제보다 더 ‘진짜 같은’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특히 눈에 띄는 요소는 백마가 끄는 바지선이다. 이는 콘스터블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바지선에서 비롯된 장면이다. 말이 강가의 견인로를 따라 걸으며 바지선을 끌고 가는 모습은, 그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이는 곧 산업혁명의 결과인 동력원의 혁신으로 증기선이 등장하며 사라지게 된다. 미시시피 강의 수로 안내인이었던 마크 트웨인 시대의 증기선 사진과 거대한 나체스 호를 타고 강물을 퍼 올리는 물레방아와 증기 터빈을 보니 산업혁명이 가져온 변화가 실감이 났다. 

콘스터블은 <플랫포드 밀 Flatford Mill>이라는 또 다른 작품에서, 견인로가 강 반대편으로 바뀌는 지점을 그려 넣었다. <백마> 역시 그러한 전환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이다.

존 콘스터블, 플랫포드 밀, 1816~17, 캔버스에 유채, 100x130cm, 테이트 브리튼 

오늘날 <백마>로 널리 알려진 이 작품은, 당시에는 <스토어 강변의 풍경>이라는 제목이었다. 제목만 보면, 그림 속의 모든 요소인 구름, 나무, 사람, 강, 그리고 백마가 동등한 비중으로 존재하는 듯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그림은 ‘백마”로 불리게 되었다. 그 순간부터 관람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화면 왼쪽 아래, 말이 끄는 바지선으로 향한다. 제목은 단지 이름이 아니라, 작품을 읽는 방식과 중심을 결정짓는 안내문이 된 셈이다. 결국 <백마>라는 제목은, 이 모든 것을 상징하는 하나의 기호가 되었다. 

그는 ‘고요한 회색의 아침’을 그렸다고 했다. 이는 우리가 그림 앞에 섰을 때 느꼈던 평온한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이다. 강물에 비친 구름과 보트하우스의 반영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 그 동안 내가 본 콘스터블의 그림은 작고 어둡고 유리로 덮여 있는데 가까이 가지 못하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6피트의 큰 작품을 감상할 수 있어 콘스터블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이발소 그림 같은 콘스터블의 그림에서 제대로 매력을 느낀 건 이번 여행의 소득이었다. 그림이 크다고 다 좋은 건 아니지만 큰 그림이 주는 위압감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메트로폴리탄에서 <델러웨어 강을 건너는 워싱턴>은 크기와 내용에서 압도적이었다. 

<백마> 부분

콘스터블의 하늘 묘사는 단순한 회화가 아니라 과학의 영역까지 아우른다. 그는 1802년 루크 하워드(Luke Howard, 1772~1864)가 아스케시안 학회(Askesian Society)에서 발표한 구름 분류 체계에 매료되어 이를 작품에 녹여냈다. 그의 시골 풍경은 단순한 자연의 재현을 넘어 숭고한 의미를 전달하며, 그림 속 적란운은 그 존재만으로도 웅장한 기상을 암시한다.

그림에 펼쳐진 구름은 솜사탕처럼 가벼워 보이며, 하늘을 부드럽게 떠다닌다. 우리는 마치 강가에 서서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구름 아래 어둡게 드리운 그림자는 날씨의 변화를 예고한다.

콘스터블은 자연의 순간을 붙잡기 위해 하늘을 관찰하고 빛을 기록했다. 그는 스케치 뒷면에 날씨, 태양의 위치, 시간을 적었고, 그 꼼꼼한 태도는 그림에 생생한 현실감을 불어넣었다.

왕립학회에서의 그의 연설은 진중했다. “회화는 시적이되 과학이며, 상상은 현실을 넘지 못하고, 위대한 화가는 자신이 위대함을 모른다”는 통찰은 그가 예술과 진리를 어디까지 탐색했는지 보여준다.

그는 게인즈버러, 로랭, 루벤스, 아니발레 카라치, 야코브 반 루이스달 같은 화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시와 설교를 많이 읽어 그의 화면에 시적 여운으로 남았다.

콘스터블은 영국에서 평생 20점을 팔았으니 그리 성공한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는 몇 년 만에 20점을 팔았다. 만일 그가 프랑스에 갔다면 더 많은 그림을 팔 수 있었을 터인데 영국인의 고집스러운 일면이 보인다. 하긴 다비드도 워털루 전투의 승자인 웰링턴 장군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주문을 거절했다. 나폴레옹 전쟁 후 영국과 프랑스 간 상처는 봉합되었지만 흉터는 도드라지게 남았다. 


최금희 작가는 미술에 대한 열정으로 전 세계 미술관과 박물관을 답사하며 수집한 방대한 자료와 직접 촬영한 사진을 가지고 미술 사조, 동료 화가, 사랑 등 숨겨진 이야기를 문학, 영화, 역사, 음악을 바탕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현재 서울시50플러스센터 등에서 서양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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