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마지막 왕자 융(隆)의 후손 부여서씨, 예산 신양 오리울 거주

25대 후손 ... 500여년 간 집성촌, 배우고 가르치며 베푸는 '선비의 삶' 이어와

입력 2021-08-02 13:3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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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마지막 왕자 융(隆)의 후손 부여서씨,  예산 신양 오리울 거주
충남 예산군 신양면 오리울 부락의 부여서씨 종손댁 전경.

백제 마지막 왕자 융(隆)의 후손 부여서씨,  예산 신양 오리울 거주
부여서씨 25대 종손 서기웅(오른쪽)씨가 기자와 함께 섰다.

[예산=쿠키뉴스] 오명규 기자 = 예(禮)의 고장 충남 예산의 신양면 오리울 고을은 백제의 마지막 왕자 융(隆)의 후손 부여서씨(扶餘徐氏)가 세거지이다. 9세조 이후 80여 가구가 500여년간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지금도 10여세대가 살고 있으며 그 종손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부여 서씨(扶餘 徐氏)의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인 서융(徐隆)이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나라가 망한 뒤 당나라에 들어가 당 고종으로부터 서씨(徐氏)라 사성되어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돌아왔다. 부여서씨는 계대의 연대가 가장 오래 된 성씨의 하나이다. 백제 의자왕의 아들이 시조가 되기 때문에 다른 서씨와는 출계를 달리한다.
 
이후 부여서씨는 광해군 때의 계축옥사로 피해를 입은 가문이기도 하다. 만죽(萬竹) 서익(徐益)은 선조 초에 문과에 급제, 비변사 이준민의 천거로 군수가 되고, 그 해 종부시첨정으로 순문관이 되어 북방에 파견되었다. 그 후 의주목사가 되었으나 탄핵을 받은 이이를 변호하는 상소를 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었고 시조를 잘하여 시조 2수가 전해진다.
 
정헌공(貞憲公) 서필원(徐必遠)은 서익의 증손으로 김집·정홍명의 문하에서 배우고 인조 때 문과에 급제, 4도의 관찰사, 총융사를 거쳐 형조·병조 판서에 이르렀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의주목사를 지낸 익(益), 이상진 등과 함께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5직(五直)’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부여서씨 가문은 많은 풍파세월을 견디며 올곧게 살아왔다. 예산 신양의 오리울 부락은 부여서씨 가문이 좌청룡 우백호의 아름다운 풍광을 즐기면서 은거하고 지내기에 좋은 '명당' 자리다. 이런 곳에 500여년전 부여서씨의 9세조(봉수) 왕손이 그 뿌리를 내렸다.
 
한때는 80여 세대의 집성촌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10여 세대가 이곳에서 모여 살고 있다. 백제의 마지막 왕자 융의 25대 후손인 팔순의 서기웅씨는 오늘도 부인과 함께 산책을 하며 가끔 둠벙에서 낚시를 하고 유유자적(悠悠自適) 세월을 여유롭게 즐기며 살고 있다.
 
한편, 서기웅씨는 국가공무원으로 37년여 성상을 봉직하고 정년을 맞아 20년여년 전 이곳 고향으로 돌아와 왕의 후손으로서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집 앞 뜰에는 200-300여년으로 추정되는 감나무가 푸르게 살아 있고, 옆 산에도 선조와 함께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밤나무가 아직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자라고 있다.
 
또 때를 같이 한 왕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며 위용을 뽐내고 있어 백제의 마지막의 왕자 서융 가문의 위엄과 한학자로 선비로 살아간 백제 왕손의 정취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백제의 마지막 왕자 서융(徐隆)의 후손 서기웅씨는 “약 500여년 전 이곳에 9세조 선조(봉수)가 자리 잡고 대대로 한학자로서 배우고 가르치며 베풀면서 후학을 양성하는 등 선비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며, “왕손의 위엄을 기억하고 지키는 가운데, 조용히 왕의 후손으로 살아왔고 또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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