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 흥망성쇠①] 100년 역사, 2년 만에 ‘흔들’

기사승인 2021-11-12 05: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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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 흥망성쇠①] 100년 역사, 2년 만에 ‘흔들’
명동 거리의 모습.  한전진 기자

‘명동(明洞)과 암동(暗洞)’


이른 추위가 기승을 부리며 첫눈이 내렸던 지난 10일 서울 명동. 서울의 대표적 관광문화 상권인 이 거리에서는 ‘명’과 ‘암’이 교차했다. 몇 해 전만 해도 쇼핑몰과 화장품 매장을 중심으로 화려한 분위기를 자아내던 이곳은 2017년 중국의 사드 보복을 기점으로 관광객이 감소하더니 이제는 코로나19로 빛을 잃어가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젊음이 가득했던 거리” 명동 거리의 한 잡화상은 과거를 이렇게 추억했다. 실제로 명동은 2000년대 후반만 하더라도 한류 열풍의 수혜를 입으며 강남을 넘어서는 ‘넘버1’ 상권으로 군림했다. 외국 관광객은 물론 국내 10‧30세대들도 한 번쯤은 들르는 장소였다. 전국 공시지가 상위 10위를 모두 명동이 싹쓸이할 만큼, 한국에서 가장 비싼 땅이기도 했다.

“5층 높이의 건물에 대형 카페와 의류점 등이 꽉꽉 들어찼고, 가게를 돋보이기 위한 인테리어 작업 등이 이어졌다. 밀리오레, 아바타몰 같은 패션몰도 들어섰고, 쇼핑몰 개점 행사 때에는 셀 수 없을 만큼 수천의 인파가 모였다”라고 잡화상은 반추했다. 

상권 자체가 무형유산

명동의 역사는 국내 근대사와 궤를 같이한다. 한국전쟁 후 이곳을 중심으로 금융회사와 상업지대가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돈이 몰리기 시작했다. 옛 국립극장인 명동예술극장에는 문화‧예술인이 모이며 황금시대를 활짝 열었다. 1950~70년대 명동 곳곳의 다방들은 문인들이 글을 쓰는 곳으로 유명했다. 명동성당은 군사정권 시기 민주화 투쟁의 중심에 있었다.

1980~90년대에는 강남 개발 등으로 잠시 쇠퇴기를 겪기도 했다. 금융회사와 쇼핑몰들이 여의도나 강남으로 자리를 옮겨갔고, IMF 외환위기에는 패션업체들 마저도 명동을 대거 빠져나갔다. 이후 2000년대 한류 붐이 일면서 명동은 다시 활기를 찾아갔다.

[명동 흥망성쇠①] 100년 역사, 2년 만에 ‘흔들’
과거의 명동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명동 흥망성쇠①] 100년 역사, 2년 만에 ‘흔들’
(좌) 코로나19로 면세점 앞에서 사라진 중국인 관광객. (우) 과거 비가오는 날씨에도 줄지어 있던 중국인 관광객. 이들 다수가 '따이공'이다.  한전진 기자

거리 가득 채운 ‘로드숍’


중국‧일본 등 외국 관광객이 명동에 몰리기 시작했다. 대형 백화점과 시내면세점 등 랜드마크가 명동에 들어섰다. 특히 중국인들의 화장품 수요가 늘면서 ‘로드숍’ 들이 거리를 점령해 나갔다. 미샤, 토니모리, 스킨푸드, 이니스프리, 더페이스샵, 네이처 리퍼블릭. 이들 모두 2000년대부터 한국 중저가 화장품이 이끈 로드숍 브랜드다.

이들 매장 앞에서 직원들이 중국어를 쓰며 고객들을 유인하는 모습은 아직까지도 기억 속 선명한 풍경이다. 명동 시내의 한 면세점 관계자는 “당시 로드숍 손님의 90%가 중국인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며 “팩과 색조 마스카라 세트를 수백만원 어치를 사가는 중국 되팔이 상인인 ‘따이공’ 들도 있었다”라고 떠올렸다. 

예견됐던 명동의 위기

명동의 외국인 관광객 의존도는 계속 커져만 갔다. 내국인보다 중국인 단체 고객이 더 중요한 고객이 됐다. 겨우 상품 한두 개를 구매하는 내국인보다 이들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한계를 드러낸 것은 사드 위기였다. 중국이 보복 조치로 한국 단체여행 전면금지 조치를 내리자 로드숍들의 매출은 바닥을 찍기 시작했다. 

로드숍들은 일본과 동남아 관광객 등으로 타깃을 바꾸기 시작했지만 과거와 같은 호황은 없었다. 다만 ‘사드 해빙’ 희망을 품으며 근근이 명성을 이어갔다. 장사는 경기에 따라 잘 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명동은 자영업자에게 호락호락 한 곳이 아니었다. 중국의 보복 조치가 극에 달했던 이 시기에도 명동의 임대료는 치솟았다.

한국인들의 화장품 소비 형태는 온라인으로 이동한 뒤였다. 이들이 명동을 향할 이유는 더 이상 없었다. 예술도 문인도 모두 사라졌다. 명동이 2000년대 초 외국 관광객으로 돌파구를 찾았지만, 이외에는 다른 출구가 없던 막다른 골목이었던 셈이다. 명동의 위기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모든 것이 영원할 줄만 알았던 시기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를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별다른 준비 없이 특색을 잃어간 명동이 안타깝다” 잡화상은 어둠이 깔리는 명동 거리를 보며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명동 흥망성쇠②]에서 계속. 

[명동 흥망성쇠①] 100년 역사, 2년 만에 ‘흔들’
명동에서 폐점한 점포들 다수가 화장품 로드숍이다.  한전진 기자

한전진 기자 ist1076@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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