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부부의 '달콤살벌'한 부부싸움, '아내'와 '동지' 사이...김구 개입 말려

[전정희 편집위원의 러브& 히스토리컬 사이트](2) 이완용 처단한 이재명 의사와 그의 아내 오인성

기사승인 2022-07-17 00: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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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혁명가의 아내가 싫소. 그러니 이제 선택은 당신이 하시오. 나를 버리던가 아니면 비밀결사를 버리던가." (박상우 소설 '칼' 중에서)

이 소설의 문장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1909년 12월 12일 오전 지금의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매국노 이완용을 처단한 이재명(1890?~1910) 의사의 아내 오인성(1890~1919)이 남편의 거사를 뜯어 말리며 하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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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에서 "매국노 이완용이 살아났는데 왜 내 남편이 사형이냐"며 재판관에게 호통 쳤던 오인성.

오인성은 평양의 딸 부잣집 장녀였다. 어려움 없이 성장한 신여성으로 천주교 계통의 평양 성모여학교에서 수학했다.

이재명은 평안북도 선천 출신이다. 태어나던 해 생부가 사망했다. 출생 연도가 1888년인지 1890년인지도 정확하지 않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 양씨를 따라 평양 아청리로 이주했다. 홀어머니 슬하에서 늘 가난에 허덕였다.

이재명의 어머니는 여자 몸으로 자식 거느리기가 어려워 평양 연광정골에서 객주 영업을 하는 임옥녀라는 홀아비와 재혼했다. 다행히 임옥녀는 순한 사람이었고 똘똘한 의붓자식 재명을 귀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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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을 처단한 '대한의사 이재명'.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생활을 했다.
하지만 1894~95년 청일전쟁으로 평양 일대가 아수라장이 되자 이들 가족은 함경남도 북청으로 피난을 떠났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 것 1898년 무렵이었다. 어머니 양씨는 이때 산후조리를 잘못해 여러 달 고생하다 숨을 거뒀다. 의붓아버지가 재명을 버린다면 고아가 될 신세였다. 다행히 임옥녀는 깨인 사람이라 재명을 미션스쿨 일신학교에 입학시키고 교육에 힘을 쏟았다.

이재명은 평양 남산현교회, 오인성은 천주교 성당을 다니며 기독교 문명의 혜택을 받으며 자랐다. 그것이 그들 혼인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재명은 총명했다. 또 불의를 참지 못했다.

"매국적(賣國敵)이 거리 활보"

1910년 경술국치 한 달 전. 이재명은 총리대신 이완용을 처단한 '살인 혐의'로 경성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뒤 동아일보 기자가 그의 아버지 임옥녀를 만나 '젊은영웅' 이재명의 어린 시절을 취재했다. 

 "우리 아들은 천자문 한 자를 가르치면 두 자를 배우겠다고 하고, 두 자를 가르치면 세 자를 배우겠다고 했소. 그리고 매우 영악스러워 내가 누구와 조금만 말다툼이라도 하면 몽둥이를 들고 왜 우리 아버지와 싸우느냐고 대들고 하여서 내가 좀처럼 누구와 시비도 못해봤소. 그래서 나는 그것이 너무 귀여워 내가 낳은 자식보다도 더 사랑했소. 그 애가 미국에 가 있을 때 내가 영문 봉투를 쓸 줄 몰라 편지도 못 보내 준 것이 지금도 원통하다오."

1904년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를 구하는 공고문이 제물포(인천)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퍼지더니 평양 남산현교회까지 닿았다. 이때 이재명은 노동자 모집에 응모하여 하와이로 떠나게 된다. 요즘으로 치자면 '외국인 노동자'였다. 그렇게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던 이재명은 그곳에서 식민지가 된 조국의 현실을 인식하게 됐다. 그리고 동향 평안도 출신인 안창호 선생의 영향으로 샌프란시스코로 가서(1906) 한인공립협회(회장 안창호) 활동을 시작했다. 

"조선 민족이여. 이준 열사가 헤이그에서 순국했습니다. 동포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위국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저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적(賣國敵)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시겠습니까."

그는 샌프란시스코 재미동포 공동회 연단에 서서 열변을 토했다. 그리고 큰 뜻을 품고 도쿄, 나가사키 등을 거쳐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미 세계의 흐름과 약소민족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재명이었다. 그는 평양을 출발해 만주, 블라디보스도크 등을 돌며 무력 투쟁을 할 동지들을 규합했다. 사람들은 '젊은청년'들이라고 불렀다.

'나쁜남자'(?) 스타일에 반한 평양 미인

그 열혈청년 재명이 아내 인성을 만난 것은 평양에서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직후인 것으로 보인다. 

"재명이가 미국 갔다 와서 러시아로 가려했으나 길이 막혀 못 들어가고 말았소. 그때 성모여학교에서 교사 노릇하던 함동철이라는 사람과 전 중화군수의 아내 소개로 여학교에 다니던 며느리를 만나지 않았겠소."

두 사람은 평양 능덕부 구리동 오인성의 집에서 혼인 예식을 치뤘다. 오인성은 눈빛이 형용하고 의지가 강한 이재명에게 끌렸다. 평양 미인 오인성이 밑지는 혼인이라고 했으나 오인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재명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샌프란시스코 노동자로 일하면서 번 돈은 모두 동지들 규합과 무기를 사들이는데 써서 정작 처갓집에 의탁해 신혼 생활을 했다.

독립운동가 부부의 '달콤살벌'한 부부싸움, '아내'와 '동지' 사이...김구 개입 말려
1920년대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과 사리원 일대. 재령강③을 가운데 두고 평야지대④가 펼쳐져 있다. 북한 최대의 곡창지대로 일제강점기 수탈기관 동양척식회사 지부가 있었을 정도다. 이재명-오인성 부부와 독립운동가 김구 노백린 등이 조우한 진초리②에는 민족교육을 위한 진초학교가 있었다. '백범일지'에서 김구는 진초리에서 하루를 묵고 신작로⑤를 따라 사리원역①으로 향했다고 밝혔다. 경성 가던 길이었다. 
다행히 오인성이 황해도 재령군 북률면 진초학교 교사로 가게 됐다. 북률면 일대는 북한 최대의 평야 지대로 동양척식주식회사가 북률동척을 세워 운영할 만큼 수탈 대상었다. 이곳에서 1920년대 소작쟁의가 발생하기도 했다. 나석주(1892~1926⋅경성 동양척식회사 본사에 폭탄 투척) 의사가 이곳 북률면 진초리 출신이었다. 진초학교는 재령 유지들이 민족교육을 위해 세운 기독교계 학교였다.


김구, 이재명-오인성 부부의 싸움 말려

어느 해 김구는 재령을 지나 사리원 기차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재령 사람 노백린(1875~1926·독립운동가)과 경성 가는 길이었다. '백범일지'는 바로 진초리에서의 이재명과 오인성 부부 얘기를 담고 있다. 

'하루는 경성 가는 길에 노백린과 안악에서 상봉하여 함께 여물평 진초동 교육가인 김정홍 군의 집에서 같이 잤다. 진초학교 직원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즈음 갑자기 동네에서 소동하는 소리가 났다. 진초학교 교장이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 사실을 말했다. 학교의 여교사 오인성은 이재명의 부인인데 이군이 자기 부인에게 무슨 요구를 강경히 하였던지 단총으로 위협하니 오 여사는 놀라고 겁이 나서 학교 수업을 감당치 못할 사정을 말하고 이웃집에 피해 숨어 버렸다 한다. 그런데 이군이 미친 사람 모양으로 동네 어귀에서 총을 쏘아대며 매국노를 일일이 총살하겠노라고 소리를 치니 동네가 소동한다는 것이다. 노백린과 상의하여 이군을 청해 불렀다.자기는 이재명이고.(아내가) 국가 대사에 충성을 바칠 용기가 없고 구차하게 안일에만 빠져 자기의 의기와 충성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자기 부부간에 다툼거리가 생겨 학교에 손해가 될까 우려한다고 기탄없이 말하였다.'(백범일지 중에서)

 김구와 노백린 등은 권총을 빼앗고 대장부가 큰 일을 하려면 더 신중히 하라 하고 마무리 지었다. 그런데 그 권총이 이완용 저격을 위한 총이었음을 김구가 뒤늦게 알고 자신의 실수를 통탄한다.

한편 작가 박상우는 '칼'에서 진초리 이재명 오인성 부부의 부부 싸움을 이렇게 다뤘다.

'그날 밤 그는(이재명) 비밀결사 동지들과 거사의 성공을 축원하는 술을 마셨다. 그리고 아내가 교원으로 근무하는 여물평 진초리로 가 지난밤의 결의를 전해주었다. 자신이 이완용을 처단하기로 했으며 그것을 위해 며칠 뒤 한성으로 가야한다는 것. 하지만 이 말을 전해들은 아내는 그의 예상과 달리 완강한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이재명이) 언성을 높이고 분통을 터뜨려 종국에는 엄청난 싸움이 되고 말았다. 전날의 술기운이 여적 남아 있던 탓에 더욱 자제력을 잃었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하지 않았니? 매국적신 놈들을 처단하는 게 내 삶의 목표라고.근데 이제 와서 나 몰라라 엉뚱한 소리를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건가?""어찌 당신 생각만 한단 말이오.이제 혼인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그리 섣불리 나서서 가정을 팽개치려 하시오. 나도 남들처럼 아들 낳고 딸 낳고 도란도란 살고 싶은 생각이 없겠소. 그것을 이해하기는커녕 오히려 죄악시하니 내가 당신과 더 이상 무슨 말을 나눌 수 있겠소."('칼' 27~29쪽)

나는 환생, 일본을 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부 싸움은 칼로 물베기였던가. '나쁜남자'를 사랑한 혁명가의 아내 또한 자신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남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동지였기 때문이다.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자 했던 오인성은 결국 남편을 따라 교직도 접고 경성으로 향했다. '사고 칠' 남편임을 알면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경성에 도착한 부부는 경성의 전태선 동지 집에 잠시 얹혀살았다. 경성 한복판 수진동, 지금의 수송동 일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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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서울 시내 지도. 독립운동가 이재명-오인성 부부의 역사 현장이다. ⓛ 지점은 조선총독부 앞 수송동 이재명 부부 경성 거처. ②는 이완용을 처단한 종현성당(명동성당) ③ 동양척식회사(현 을지로 입구) ④ 청계천 남쪽 입정동. 이재명 의사 은거처 ⑤ 이완용이 자상 당한 후 후송된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 ⑥ 이재명 의사가 순국한 서대문형무소
'(이재명은 아내를) 사립 양심여학교(1908년 동덕여자의숙과 합병. 지금의 안국동로터리 동덕빌딩 자리. 동덕여대 전신인 셈)에 입학을 시켜놓고 자기는 야학을 다녔고 낮이면 노동에 종사하야 푼푼이 버는 돈으로 학비를 대여오던 터이라. 낮이면 노동하랴 밤이면 학교에 가랴 그나마 받은 보수도 얼마되지 않는데 아내 학비를 대었다. 그러니 자기의 의식(衣食)이 어떠랴. 일신의 피로도는 고사하고 금전의 핍박이 극심하였지만 그래도 그는 조금도 피곤하다고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생활의 핍박을 핍박으로 느끼지 않고 도리어 나날이 늘어가는 자기 아내의 배움에 대해 한량없는 희망과 기쁨 품고 있어서 내외간에 아끼는 마음과 사랑이 나날이 깊어 가던 중 마침내 그와 같은 계획으로 말미암아 평양으로 내려가게 되자 계획 방침을 궁리하느라고 밤낮 없이 뒤숭숭한 그 머리속에 그래도 하루에 몇 번씩 아내가 그리워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1924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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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 이후 작위를 얻은 이완용(앉은 인물). 아들, 손자들과 자신의 저택에서 찍은 사진. 이재명에 습격을 당한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재명은 그렇게 평양과 만주 등을 오가며 김용문 이동수 김병록 김정익 조창호 오복원 박태은 이응삼 전태선 김병현 이학필 김이걸 등의 동지를 규합, 각자 제거 매국적신들을 정하고 처단하기로 했다. 그 제1 원흉 이완용(1858~1926)은 이재명이 맡았다.

노동으로 아내 학비 댄 독립운동가

그리고 거사가 확정되자 이재명은 수진동 아내의 곁으로 가지 않고 경성부 남부 입정동(서울 중구 입정동 일대) 여관을 숙소로 삼고 아내에게 화가 미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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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명동성당 앞 이재명 의사 의거 터 표지석. 이재명은 1909년 12월 12일 당시 종현성당에서 벨기에 레오폴드 2세 국왕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던 이완용을 습격해 처단했다.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30분. 내각총리대신 이재명은 종현성당(현 서울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레오폴드2세 국왕의 추도식을 마치고 나오는 이완용 일행을 습격, 단검으로 난자했다. 수행비서와 경호원 등 일행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이때 이재명의 칼에 1명이 사망했는데 그가 과연 인력거꾼인지 경호원인지를 놓고 설이 분분하다.

아무튼 이완용이 죽은 것으로 확신한 이재명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그도 일경에 의해 허벅지를 찔린 채였다. 이완용은 깊은 자상을 3군데나 입고 '대한의원'(현 서울대병원)긴급 후송됐다. 그리고 우리나라 의료사상 첫 흉부외과 수술 환자가 되어 운좋게 살아났다. 덧붙이자면 이완용은 이때 입은 자상으로 폐렴에 시달리다가 해수병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이재명은 '이완용 암살미수' 혐의로 서대문감옥에 수감됐다. 동지 13명도 체포되어 경성지방재판소 공판에 넘겨졌다. 독립운동 사료에 따르면 오인성도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써 있다. 

1910년 5월 18일 1심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 이재명은 분연히 일어나 재판장에게 경고한다.

"너희 법이 불공평하여 나의 생명은 빼앗지만 나의 충혼은 빼앗지 못할 것이다. 지금 나를 교수형에 처한다면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너희 일본을 망하게 할 것이다. "

그리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아내 오인성도 고함을 치며 울분을 토했다. 1958년 잡지 '신태양' 9월호에 실린 김동산(이재명과 함께 한 비밀결사요원 김용문으로 추정)의 당시 회고 기록.

'방청석에 앉아 있던 그의 부인도 큰 소리로 "이완용이 생명을 보전하여 살아났는데 사형이 웬 말이냐!"고외쳤다.'

오인성, 꽃다운 여학생

그 김동산 수기는 오인성에 대해 아래와 같이 덧붙이기도 했다.

'서울 진명여학교(양심여학교를 오인한 듯)에 오인성이라는 꽃다운 여학생이 있었다. 오인성은 역시 이재명과 동향인 평양 출신으로 방년 스무 살이었다. 아기자기하게 고운 인물은 아니로되 희고 동그스름한 얼굴에 시원한 큰 눈이 어울려 흠썩한 인상을 주는 타입이었다.'

그해 8월 13일 이재명에 대해 고등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만에 일제는 이재명을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했다. 

독립운동가의 아내는 어찌 됐을까. 남편 순국 후 중국 지린과 상하이 일대를 돌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시 귀국했고 이 일로 체포된 뒤 증거부족으로 석방됐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를 더 심하게 받았다. 오인성은 다시 중국으로의 망명을 도모하던 중 병을 얻었고 이로 인해 스물아홉 나이에 요절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아내의 요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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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진안군 이재명 의사 동상. 그의 아내 오인성은 자식 낳고 오손도손 살고자 했으나 역사가 허용하지 않았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재명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하지만 후손이 없어 정부가 훈장을 보관하고 있던 것을 '진안 이씨' 문중에서 이재명의사추모사업회를 발족하고 기념관과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사진=전정희 
오인성의 행적을 짐작케 하는 김동산의 기록.

'나는 5년 징역을 마치고.북만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오인성 여사가 길림학교에서 학교에 다닌다는 말을 듣고 길림에 들러 오인성 여사를 만나보았다. 몇 해 만에 허허 만주벌판에서 기구한 운명들을 지니고 있는 서러운 사람들을 만나니 비참한 눈물이 없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은 이미 죽었으나 산 사람은 이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 사뭇 죽은 사람만 불쌍하지 뭐요" 하고 오인성 여사는 눈물을 흘렸다. 내가 목릉(조선인 망명지. 중국 흑룡강성의 도시)으로 간다는 말을 듣고 오여사도 굳이 따라겠노라고 하여 우리 일행은 함께 목릉으로 갔다. 목릉 구참에는 안중근 의사의 자당(어머니)이 그의 계씨(남동생)⋅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소왕령으로 갔다. 그곳에는 이동휘 유동렬 양기탁씨와 같은 독립운동 거두들이 있었다." 

lakajae@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