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기사승인 2021-06-27 04:3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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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 장충단공원에서 N서울타워까지
- 무너뜨리고, 묻히고, 옮겨지고, 갈 수 없고
- 최고 건축가의 성곽파괴
- 조급함이 이뤄낸 국적불명 복원
- 그래도 우리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위대한 유산
-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와 떠난 순성길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장충동 다산성곽길/ 다산성곽길은 한양도성을 둘러싼 성곽 중 장충체육관에서 다산팔각정까지 약 1km 구간으로, 남산과 서울 시내 중심부 조망이 가능하다. 

[쿠키뉴스] 곽경근 대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한양도성 장충동 구간 다산성곽길을 오르며  내내 맴도는 문구다.
목멱산(남산)은 예로부터 앞산이란 뜻의 ‘마뫼’로 불렸다. 우리민족에게 남산은 함부로 사고 팔수 없는 정신적 공유재산이었지만 이 땅을 침탈한 일제는 최초의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을 일개 공원으로 만들어 격하시키면서 도성의 일부를 훼손하였다. 6,25 전란 이후에도 우리 유산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던 군사정권 시절 역시 호텔과 공공기관, 국가시설 등을 건립하면서 공공연하게 많은 훼손을 가져왔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600년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내며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는 한양도성은 총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미래도시 서울을 되짚어보는 ‘한양도성 둘러보기(巡城)’를 10회에 걸쳐 연재(순서는 기사하단)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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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교회에서 내려다 본 장충단 전경/ 멀리 N서울타워와 동국대학교가 보인다. 조선시대 국립현충원인 '장충단'은 일제강점기에 놀이공원으로 격하되고 박정희 정권 시절에도 자유센터와 국립극장 등 정부 기관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21만평의 규모가 9만여평으로 크게 축소되었다.

▷민족혼 철저히 말살한 장충단(獎忠壇)
“탕, 탕, 탕”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벨기에제 브라우닝 권총이 불을 뿜었다. 안중근이 국적(國賊) 1호인 조선 초대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저격하는 순간이다. 그는 현장에서 바로 체포돼 뤼순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이듬해 3월 26일 향년 31세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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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博文寺) 전경/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은 항일의 상징이었던 장충단을 공원화 시키고 1932년에는 장춘단의 한 구역 언덕 이름을 이등박문의 호를 따 '춘무산'이라 명하고 '박문사'를 지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932년 10월 26일, 이미 조선의 현충시설인 장충단(獎忠壇)에 벚꽃을 심고 놀이터를 만들어 공원으로 격하시킨 일본은 장충단 부지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을 완공했다.
사찰이 자리 잡은 언덕을 춘무산(春畝山)이라고 부르고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이름을 따서 박문사(博文寺)라 지었다. 춘무는 이토의 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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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문사를 건축하면서 일제는 경희궁의 대문인 흥화문을 옮겨다 이등박문의 사당 정문으로 사용했다.

일본은 박문사를 지어 성역화하면서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의 궁궐들을 마구 훼손하였다. 본당만 신축일 뿐 나머지 원구단 자리에 있던 남별궁의 석고각과 광화문 담장, 경희궁 흥화문, 경복궁 선원전 등을 뜯어다 박문사 건축에 사용했다.
항일의 상징 장충단에는 이외에도 후일 거짓으로 들통났지만 황국신민화를 위해 ‘육탄3용사’ 동상도 세웠다. 1945년 11월, 소실된 박문사 자리에 신라호텔이 들어섰는데 박문사를 지은 일본 건축회사인 다이세이가 신라호텔도 건설했다. 달갑지 않은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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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호텔신라 정문에 있었던 흥화문은 제자리를 찾아 경희궁으로 돌아갔다.

2024년 완공을 목표로 호텔신라는 지금 영빈관과 면세점 자리에 정통한옥호텔을 짓고 있다.
남산 조망을 막고 있는 현재의 호텔 건물과 달리 나름 한양도성 성곽과 조화를 이룰 한옥호텔은 치욕의 역사를 지우고 시민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멋진 건축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우리 스스로 파괴한 문화유산
일제 강점기 일본은 우리의 민족혼의 말살을 위해 전국 명산 정수리에 대못을 박고 궁궐과 한양도성의 성문과 성곽, 전국에 있는 읍성 등을 신도시 건설 명목으로 훼철(毁撤), 파괴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하지만 해방이후에도 우리 문화유산의 훼손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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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한국자유총연맹 담장은 인근 성곽을 파괴해 쌓았다.

경신중고등학교 신축(1955년), 남산 국회의사당 건립공사(1959년), 아시아반공연맹의 자유센터 건립(1964년), 퇴계로 연장공사 광희문 일대(1966년), 구 타워호텔 건설(1969년), 남산종합송신소 설치(1972년) 등 우리 손으로 무너뜨린 한양도성 훼손의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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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단된 한양도성/ 비교적 성곽이 잘 보존된 장충체육관 뒷편 다산성곽길을 오르다 보면 팔각정이 보이는 지점에서 안타깝게 성곽길은 끝난다. 자유센터와 구 타워호텔을 건축하면서 성곽을 헐어내 성돌로 건물 축대와 담장을 쌓았다. 

특히 남산 주변의 성곽 유적은 식민지배의 아픈 상처를 씻어내지 못한 채 한 유명 건축가의 손에 의해 자유센터를 건축하며 거리낌 없이 성벽 해체 후 성돌을 옮겨다 축대로 사용하였다. 바로 위에 위치한 구 타워호텔(현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호텔은 도성 위로 건물을 지었다. 남산 정상에는 송신소 건설을 위해 성벽 철거는 물론 성곽 인근의 군인들 숙영지인 성랑(城廊)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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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복원한 한양도성 남산지구 성곽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
이 시멘트 성벽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공사 결과다. 한 건설업체가 당시 돈 4억5천만원을 들여 남산과 장충동 구간에 1977년 10월초부터 1978년 12월말까지 15개월 동안 보수 및 복원공사를 마쳤다. 

이후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엉터리 복원과 보수도 훼손 못지않게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남산 3호 터널 건설과정에서 나온 돌에다가 시멘트를 발라 복원 했다는 남산 구간의 성곽은 어느새 40년의 세월이 흘러 때는 탔지만 타 구간의 성벽 위 여장과는 모양이 틀려 낯설다.
취재에 동행한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는 “문화재의 가치는 역사성에 있다. 원형 유지가 중요한 문화재는 보수와 복원에 신중해야한다.”면서, “역사적 고증도 없이 시멘트를 발라 날림으로 복원한 한양도성 여장의 경우가 아니더라고 콘크리트는 전도체여서 문화재에 해를 끼칠 우려가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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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동 다산성곽길의 여장도 역시 전문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시멘트와 규격에 맞지않는 돌로 무리하게 복원해 안타까움 더한다.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부분부분 금이 가거나  부서져 떨어져 나갔다.

장충동 골목길까지 6회에 이어 이번 회에서는 장충단공원에서 신라호텔과 장충체육관, 장충동(다산)성곽길, 한국자유총연맹, 반얀트리호텔에서 도로를 건너 국립극장, 남산성곽길, N서울타워까지 순성(巡城) 길을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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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비

 - 장충단비(奬忠壇碑)
중구 장충동 장충단 공원 초입의 대한제국기 을미사변 관련 기념비로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호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일본인에게 시해되자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을 비롯하여 많은 장병들이 일본낭인과 싸우다 목숨을 바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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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이 황태자 당시 쓴 '奬忠壇'

고종은 그들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1900년11월, 현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사당(祠堂)인 장충단(奬忠壇)을 짓고 비를 세워 해마다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했다. 그 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죽은 충신들의 제사도 모셨다. 사당은 6·25전쟁 때 파손되었고, 비만 남아 19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비의 정면에는 순종이 황태자 당시 쓴 '奬忠壇'이라는 세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민영환이 지은 143자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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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표교

- 수표교 (水標橋)
이 다리는 원래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물의 높이를 측량하는 관측기구인 수표(水標)를 세워 수표교라 불렀다. 한양 도심을 흐르는 개천(開川)의 다리는 조선 초에 흙(토교·土橋)이나 나무(木橋)로 지었다. 하지만 태종 연간부터 석교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세종 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시작하면서 철거하여 처음으로 옮겼다가 1965년 이 곳으로 옮겼다. 다리 길이 27.5m, 폭 7.5m, 높이 4m이며 재료는 모두 화강석이다. 수표교와 함께 있던 수표(보물 제838호)는 장충단까지 같이 왔다가 청량리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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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리모델링한 장충체육관 전경

- 장충체육관
한양도성 장충동 다산성곽길 구간의 시작은 장충체육관이다. 1955년 6월 23일 육군체육관으로 개관한 장충체육관은 노천체육관으로 국내 최대 규모였다. 1959년에 서울시가 인수·운영을 맡았고, 1963년 2월 한국의 첫 돔 경기장으로 탄생한다. 현재의 체육관은 2015년 1월 리모델링한 새 시립체육시설이다. 항간에 ‘필리핀 원조로 지었다’는 말이 돌고 있지만, 자금·설계·시공 모두 국내 기관과 기술진에 의해 지어졌다. 60년대 김기수의 권투와 김일의 프로레슬링을 통해 삶에 지친 시민들을 위로해 주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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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성곽길

- 장충동 다산성곽길
장충체육관을 끼고 신라호텔 면세점 뒤편으로 비밀의 정원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산책길이 있다. 장충동 한양도성 다산성곽길이다.
오른쪽엔 호텔신라 야외정원과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성곽이 이어진다. 성 안인 호텔과 성 밖 주택가 사이 감추어진 비밀의 길이다. 장충동 주민들의 건강 산책길이고 비밀의 문을 열고 들어 온 연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데이트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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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성곽길 중간에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만든 통문

비밀의 정원에서 암문(暗門)으로 불리는 통문(通門) 통해 성 밖으로 나가면 오른쪽으로 펼쳐지는 높다란 성벽이 이어지고 오래된 주택과 구멍가게들 사이로 예쁘게 단장한 카페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성 밖 길에서 올려다보는 높다란 성곽은 성안 비밀의 정원과 사뭇 다르다. 오래된 돌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모습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는다. 다산 성곽길에서는 시대별 축성기법의 차이를 관찰할 수 있다.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면 ‘생(生)’ 자 (천자문 42번째)와 ‘곤(崑)’ 자 (천자문 47번째)가 새겨진 각자성석(刻字城石)을 찾을 수 있다 이 구간의 성벽은 경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쌓았다. 비바람에 패이고 이끼 낀 성돌에서 600년 조선의 영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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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개관한 숲속도서관 '다산성곽도서관'에서 본 한양도성 성곽/ 다산성곽도서관은 성곽과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특성과 실내조경을 이용해 실내에서도 자연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자연 친화 도서관으로 조성했다. 특히 3층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생까지의 학생들을 위한 트윈 세대 공간으로 특화되어 있다.

혹 순성길에 여유가 있다면 지난 달 개관한 '다산성곽도서관'도 들려보자. 실내서도 조망이 가능하지만 한양도성 성곽이 한눈에 들어오는 3층 야외독서쉼터에서 성곽 풍경을 감상하며 책장을 넘겨보는 것도 행복한 추억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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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 호텔의 골프연습장/ 반얀트리 호텔 밑으로 한양도성 성곽이 묻혀있다.

 -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Banyan tree Club & Spa Seoul)
1km 남짓한 성곽길을 한번은 성 안으로 한 번은 성 밖으로 걷다보면 어느덧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하 반얀트리 호텔)로 들어선다.
다산성곽길은 팔각정을 지나 반얀트리 골프장에 접어들면 사라진다. 성곽이 반얀트리호텔 부지를 가로질러 지나고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일제가 패망한 뒤 전쟁도 지나고 1960년대 박정희 정권은 반공 지도자를 기른다며 장충동 일대에 아시아민족반공연맹자유센터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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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얀트리호텔 앞 도로에서 '한양도성 흔적표시'에 대해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학예연구사는 “서울시는 4년여에 걸쳐 ‘한양도성 단절구간 흔적표시’ 사업을 진행했다”면서 “건물‧주택가로 사라진 구간 내 주요 갈림길에 바닥 흔적페인팅 총 8개소 235m, 바닥동판 총 300개소를 표시했다”고 설명한다.

5개 건물로 이뤄진 자유센터 중 가장 남쪽에 있던 17층 높이 국제자유회관은 도성을 허물고 그 위에 지었는데, 타워호텔로 불리다 몇 번의 주인이 바뀌며 지금은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이란 이름으로 현대그룹이 운영 중이다. 당시 건축을 위해 허문 도성의 성돌은 곳곳에 축대를 쌓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반얀트리 호텔에는 이곳 아래 한양성곽이 묻혀 있다는 매립흔적 표시가 도로에 그려져 있다.
답사에 동행한 서울역사박물관 조치욱 학예연구사는 "‘문화재란 선조들이 남긴 유산으로서 삶의 지혜가 담겨 있고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보여주는 귀중한 유산이라고 문화재보호법에 정의되어 있다"면서“언젠가는 세상에 그 얼굴을 드러내겠지만 내 발아래 우리의 역사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민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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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센터 전경/
60-70년대 최고의 건축가로 활동했던 김수근은 정권에 협력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특징적인 건축물을 지었다. 자유센터 외에도 88올림픽 주경기장, 워커힐 호텔의 힐탑바, 육군사관학교 교훈탑, 인천상륙작전기념탑, 세운상가, 청계천 3·1고가도로, 주한미군대사관, 치안본부청사, 민주인권기념관(구 남영동 대공분실) 등이 모두 그의 작품이다.

- 한국자유총연맹(자유센터)
1960년대 남북 이념 대결을 위해 장충동 일원에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이 건축되면서 한양도성남산구간은 우리 손으로 해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와 침략미화를 위해 훼손이 시작된 구간에 동족상잔의 이념대결은 도를 더했다.

반공지도자를 양성하고, 반공을 홍보하기 위한 자유센터. 1963년 자유센터는 반공세력의 총본산으로, 타워호텔은 반공대회 참여 인사들의 숙소로 건설됐다. 두 건물의 남쪽에서 600년을 지켜 온 한양도성 성곽을 헐어내고 그 성돌로 건물의 축대를 쌓고 담장을 둘렀다. 이념이 역사를 이긴 시대의 아이러니 자유센터는 국내 최고의 건축가로 불리는 김수근이 설계했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1세였다. 그는 대학원생 시절인 1959년, 남산 국회의사당 현상응모를 통해 한국건축계에 화려하게 등장한다. 몰론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정권에 의해 실제 지어지지는 않았지만 5년 뒤인 64년 자유센터 건립 시 국회의사당 현상공모 실력이 크게 인정받았다.

하지만 천재건축가로 칭송받는 그가 우리 건축사에 남긴 그 어떠한 업적도 이 자유센터로 한양도성을 훼손한 것을 가릴 수는 없다. 개인의 업적을 위해 역사를 묻은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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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센터 석축 아래 한앙도성 장충동 성곽에서 옮겨온 ‘崗字 六百尺(강자 육백척)’으로 쓰여진 각자성석이 눈에 띈다. 

반얀트리에서 자유센터로 내려오면 수많은 성돌들이 축대를 이룬다. 이 성돌들 중에는 ‘崗字 六百尺(강자 육백척)’이 새겨진 각자성석도 있다. ‘崗(강)’은 천자문의 48번째 글자다. 이는 한양도성의 48번째 구간이며 길이가 600척임을 의미한다. 성곽이 사라진 반얀트리 골프연습장 부근에 있던 성돌이라 추정된다. 현대의 건축을 위해 600년 역사가 파괴된 현장이다. 제자리를 떠난 돌들은 오늘도 그 치욕을 그대로 떠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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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충단로에서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 바로 아래 남소문터 표석이 있다.

- 남소문 터
한양도성 성문은 4대문과 4소문 외에 '남소문(南小門)'이 더 있었다. 남산 국립극장에서 현재의 장충단로를 따라 한남동으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있었다. 세조실록에 따르면 이 문을 축조한 연대는 나타나있지 않지만 세조 2년 11월 20일에 임금이 종친과 재상들을 거느리고 청학동(현 장충동 일대)에 나가 건립 예정지를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이야 한남대로가 간선도로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옥수동이 더 중요했다. 한강을 따라 내려온 물산의 집적지인 두모포의 위치가 옥수동 동호대교 북단이었다. 광희문을 지나 옥수동 부근 한강에 접근했지만 너무 멀었다. 이에 세조 3년(1457)경에 남소문을 만들어 거리를 단축한다. 그러나 산이 험하여 기대만큼 통행량이 많지 않자 10여년 만에 폐쇄됐다. 표지석에는 “서울의 소문으로 세조 때 세우다. 예종 원년(1469) 음양설에 따라 철거, 그 후 일제 강점기 주초마저 없어지게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 표지석을 통해 짧았던 남소문의 흔적을 가늠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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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장 전경

 - 국립극장
1950년 창립한 국립극장은 1973년 10월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개관 당시에 약 1,322㎡ 넓이의 무대와 3개 층 1,494석의 객석, 당시로써는 최첨단 시설인 회전무대, 수동식 장치 봉 등을 갖췄다. 쾌적한 관람환경 조성, 무대시설 현대화 및 자연음향 개선, 장기적 안전성 보강을 위해 총사업비는 658억 원이 투입해 지난 5월, 리모델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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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성곽의 성벽 아래 성을 쌓은 사람과 책임자, 지역을 적어놓은 '각자성석'이 보인다.

- 안이토리가 쌓은 남산성곽
도청감관조정원오택윤상후(都廳監官趙廷元吳澤尹商厚) 편수안이토리(邊首安二土里) 기축팔월일(己丑八月日) “숙종35년(1709) 8월에 도성 개축 임시 책임자인 조정원, 오택, 윤상후가 함께 공사를 감독하고 전문 석수 ‘안이토리’가 공사에 참여했다”
국립극장과 남산순환도로 차량진입통제 초소를 지나 목멱산으로 오르는 차도에서 오른편 순심로로 접어들어 조금만 올라가면 성돌에 석수 안이토리(安二土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안이토리’ 얼 듯 일본인 이름 같기도 하고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을 정도로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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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이토리라 쓰여진 한자가 명확히 보인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그의 저서 '한양읽기 도성'(눌와 펴냄)에서 도성을 쌓은 수많은 민초들 가운데에서 안이토리를 소개한다. 홍 교수는 국가의 공식 기록물인 ‘승정원일기’ 숙종 37년(1711) 4월 8일 자에서 “안이토리가 도성의 광희문을 공사하다 돌에 깔려 사망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안이토리는 평범한 석수였지만, 왕실의 공식 기록물과 도성 성벽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그의 나이가 얼마인지 가족관계가 어떠한지, 그의 인생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는 어디에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다. 그저 도성을 쌓는 데 전력하다 목숨까지 바친 일꾼 안이토리. 그는 각자로 남고 ‘승정원일기’에도 이름이 올라갔지만 한양도성을 쌓고 고치는데 이름 없이 땀과 노동을 바치고 사라진 백성들은 얼마나 많을까? 도성은 누가 쌓았는가? 임금이 결정하고 관료와 장수들도 큰일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몫은 돌을 떠서 나르고, 쪼아서 모양을 만들고, 땅을 파고 다지며 성돌을 쌓아 올린 민초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조선의 명목상 주인은 임금이었지만, 한양도성은 백성의 노고가 만든 것이다. 한양도성은 600년이 지난 지금도 이름 없는 헌신한 수많은 안이토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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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당시 초축한 성곽 형태가 잘 남아있는 남산 동편 성곽길

- 남산 성 밖 나무계단길
안이토리 안내문을 지나 남산 전망대를 향해 오른다. 동쪽 능선인 나무계단 오른쪽으로 태조 시기의 성벽은 축성된 지 이미 600여 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초축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대부분 편마암으로 쌓은 성돌 하나하나를 살피며 98일 만에 완성한 한양도성 초성(初成, 처음 쌓은 성)의 흔적을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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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의 배부름 현상에 대해 설명하는 조치욱 서울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 성곽의 배부름 현상
“여기 성벽은 마치 배가 부른 것처럼 불룩 튀어나와 있죠?” 남산성곽길을 오르던 조치욱 학예연구사가 성벽의 한쪽 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한다. “한양도성은 600년이 넘은 구축물이다. 오랜 세월 성벽 안쪽으로 물이 스며들면서 토질과 잡석이 바깥 성돌을 밀어내며 ‘배부름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며 “성벽에 유리판 같은 것들을 부착해 놓았는데 이것은 거리 높이 등을 측정하는 ‘광파기’등 첨단 장비가 측정할 수 있도록 설치 놓은 것이다. 장비를 이용해 성벽 전체의 높이 변화를 확인한다. 경사계를 달아 성벽의 각도를 확인하고 성돌 사이의 이격을 정밀하게 측정해서 성벽구조물의 안전을 진단한다."고 상세히 설명했다. 현재 한양도성에서 배부름, 석재 균열, 수목 생장 등으로 각종 변형이 일어난 구간은 총 10여 곳에 이른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미군통신부대 초입의 바리케이드/ 한양도성 18,627km에서 유일하게 접근이 불가한 구역이다.

 - 마군 통신부대
안이토리의 생각에 잠겨 남산 성곽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순성길은 중단된다. 한양도성 18.6㎞ 가운데 유일하게 답사가 불가능한 지역이다. "'주한미군방송(American Forces Korean Network : AFKN)'이 있으니 우회하라"는 안내판이 있다. 광화문 쪽에서 남산을 볼 때 가장 왼쪽의 송신탑이 있는 곳이다. 주권국가의 수도 한 복판에 외국군대 시설이 주둔하고 있다.
“‘제한구역 경고’ 1950년 통과된 국내 보안법 제21절의 규정에 의거 1954년 8월 20일자 국방장관 지시에 의거하여, 사령관의 명에 따라 이 지역은 제한 구역으로 선포되었음” 도로 입구에 설치된 바리케이드에 붙어있는 문구이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앞에 보이는 성벽의 끝부분부터는 더이상 접근이 불가한 '금단의 성벽'이다.

동서고금에 군사적으로 점령된 상태가 아닌 나라의 한복판에 외국 군대가 주둔하는 것은 한국의 서울이 전무후무할 것이다. 지난 9일 서울시는 ‘남산예장공원’ 개장식장에서 “2009년 시작한 ‘남산르네상스 사업’이 12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고 발표했다. 아직 미군통신부대가 그 자리에 앉아 성곽길을 따라 걸을 수도 없는데.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미군통신부대 건너편 성 밖 순성길은 송림이 우거져 남산구간에서 가장 아름답고 비밀스런 성곽길이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금단의 땅, 도로 건너편 성 밖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남산 정상까지 불과 200여m로 짧은 구간이지만 소나무와 어우러진 성곽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남산 정상에 위치한 '서울중심석'

 - ‘서울의 중심점’ 표석
서울의 한가운데는 어디일까. 위성항법장치(GPS)로 측량한 결과 서울의 지리적 중심점이 남산 정상부에 있음을 확인하고 이 자리에는 서울의 중심점임을 표시하는 조형물을 설치했다. 정확히 서울특별시 중구 예장동 산5-6 위도 37도33분06.8904초, 경도 126도59분30.664초 해발높이 267m 지점이다. 이곳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위치 결정을 위한 측량의 출발점인 대한민국 최초의 경위도 원점이 있던 곳으로, 국가기준점(서울25 삼각점)과 지리적삼각점으로서 측지와 지적 측량에 쓰이는 기준점이 된다.
종로구 인사동 하나로빌딩 지하에는 조선 고종 때인 건양 원년(1896년)에 설치된 화강암으로 만든 서울의 중심점 표지돌이 있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남산 정상에 오르면 시원한 서울 전경이 한 눈에 펼쳐진다.

- 남산 정상에 오르다
남산은 서울의 중심부에 위치한 서울의 상징으로 해발 270m이다. 본래 이름은 경사스런 일을 끌어들인다는 ‘인경산(引慶山)’이었으나 조선 초 태조 이성계가 남산의 산신에게 목멱대왕이란 벼슬을 내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목멱산(木覓山)’이란 이름으로 봉하였다. 그러다 조선시대 한양의 남쪽에 있는 주작(朱雀)에 해당한다는 의미의 ‘남산(南山)’으로 자연스럽게 불리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가 극에 달한 1940년 3월에 남산 일대가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많은 건물과 시설이 들어서면서 본래의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다. 전쟁과 성장기를 거치며 훼손이 이어지다 1991년부터 10년간 ‘남산 제 모습 가꾸기’사업을 통해 훼손된 지형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N서울타워 야경/ 남산 정상에 우뚝 솟은 전망 탑으로 해발 480m 높이에서 360도 회전하면서 서울시 전역을 조망할 수 있는 명소이다.

-N서울타워(N Seoul Tower)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남산 정상 부근에 위치한 전파 송출 및 관광용 타워이다. 1969년에 착공하여 1975년 7월 30일 완공되었다. 높이는 236.7m, 해발 479.7m이다. 수도권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이 타워를 이용하여 전파를 송출한다. 전망대에서 서울 시내 전역을 내려다 볼 수 있으며, 맑은 날씨에 찾는 관광지로 잘 알려져 있다. 남산에 있어서 보통 남산타워라고 널리 부르고, 서울에 있어서 서울타워라고 부르지만, 행정안전부에 등록된 정식 명칭은 "YTN서울타워"이다. N서울타워 전망대 2층(T2)에서 서울 한양도성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남산 정상 아래 성 밖 순성길/ 태조 당시 초축 형태와 숙종 시 개축한 네모 반듯한 성돌로 쌓은 성곽이 확연히 구분된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기획연재] 한양도성, 600년 서울을 품다. 7편
그래픽=이희정 디자이너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kkkwak7@kukinews.com 기사모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