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책장을 넘기면 유독 환한 빛으로 일렁이는 페이지가 있다. 강원도 동해시 망상동 돌이 많아 이름 붙여진 ‘석두골’에서의 정월 대보름이다. 소설가로 살아가는 지금도 내 문장의 밑불은 그 시절 망상의 너른 들녘에서 보낸 뜨거운 밤에서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름날 해가 뉘엿해지면 석두골 소녀였던 나는 빈 깡통을 찾아 헤맸다. 못으로 구멍을 숭숭 뚫고 철사를 연결해 만든 깡통 안에 숯불을 담으면, 세상 그 어떤 조명보다 화려한 ‘쥐불놀이’준비가 끝난다. 어둠이 내린 논둑에서 원을 그리며 깡통을 돌릴 때, 밤하늘에 새겨지던 붉은 궤적은 어린 내게 우주의 순환을 가르쳐준 첫 번째 필체였다.
마을은 온통 축제였다. 한쪽에서는 ‘깡통 차기’를 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돌담을 넘었고, 마당 넓은 집에는 없이 ‘윷놀이’판이 벌어졌다 “모야!”하는 함성에 겨울바람도 움츠러들었다. 무서운 줄 모르고 높이 솟구치던 ‘그네뛰기’는 또 어떠했나. 버선코 끝에 걸린 보름달을 툭 차고 내려오면, 세상 모든 고을이 발아래 있는듯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맛의 공유’였다. 대보름이면 우리는 커다란 양푼을 들고 이 집 저 집 문을 두드렸다. “보름 밥 얻으러 왔어요!” 외치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가마솥에서 갓 퍼낸 찰진 오곡밥과 정성껏 볶아낸 아홉 가지 묵은 나물을 아낌없이 담아주셨다.
그렇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면 양푼 안에는 온 동네의 정이 가득 고였다.
아이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추장 한 숟갈 넣고 썩썩 비벼낸 그 ‘보름 비빔밥’은 세상 그 어떤 성찬보다 달콤했다. 서로의 밥숟가락이 부딪히는 소리, 입가에 고추장을 묻히고 웃던 친구들의 얼굴. 그 시절 석두골 사람들은 믿었다. 여러 집의 밥을 나눠 먹어야 일 년 내내 건강하고 복이 깃든다는 것을. 윷판의 말 하나에도 정을 담고, 비빔밥 한 술에도 소망을 담던 그 순박한 풍경들이 이제는 내 소설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서사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석두골 소녀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었고, 이제는 인천의 바다를 보며 삶을 기록한다. 동해 망상의 달빛이 나를 키웠다면, 인천의 바람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매년 대보름이 오면 나는 여전히 마음속 깡통에 불을 지핀다.
동해의 푸른 파도가 밀어 올린 달빛과 인천의 너른 벌판을 비추는 달빛은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나의 문장을 비춘다.
지친 일상에 마음이 닳아버렸다면, 이번 대보름엔 가까운 곳에서 환한 달을 마주해 보길 권한다. 정월 대보름의 달빛은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빛이 아니라,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함께’라는 가치를 일깨우는 온기이기 때문이다. 석두골의 쥐불이 그러했듯, 당신의 가슴 속에도 식지 않는 희망의 불꽃 하나가 둥글게 피어나길 소망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