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4일 (4)
관광은 균형 아닌 밀도의 산업 [이재환 박사의 k-컬처 & 관광⑫]

관광은 균형 아닌 밀도의 산업 [이재환 박사의 k-컬처 & 관광⑫]

승인 2026-06-01 13:00:02 수정 2026-06-01 13:04:36

정치 언어는 늘 ‘균형’을 말한다. 균형발전, 균형예산, 균형배치. 듣기에는 정의롭고 아름답다. 그러나 관광만큼은 다르다. 관광은 균형의 산업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해, 관광은 밀도의 산업이다. 많은 정책은 관광을 ‘이동’의 문제로 착각한다. 공항을 짓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넓히면 관광이 성장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것은 필요조건일 뿐 본질은 아니다.

관광의 본질은 사람을 얼마나 많이 이동시키느냐가 아니라 희소한 시간과 소비, 감정을 특정 공간에 얼마나 강하게 압축시키느냐에 있다. 교토의 힘은 사찰 숫자에 있지 않다. 방콕의 경쟁력은 야시장 개수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 도시의 진짜 힘은 관광객이 왜 지금 여기 머물러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도시 전체에 촘촘히 설계해 놓았다는 데 있다. 골목은 동선이 되고 음식은 기억이 되며, 야간경제는 체류가 되고 공연은 감정이 된다. 도시 전체가 하나의 소비 구조이자 서사구조로 작동한다. 이것이 밀도다.

올해 강원 영월은 그 가능성을 실증했다. 영화 〈왕과 사는 남자〉 흥행 이후 관객은 스크린 밖에서 단종의 유배지인 청룡포와 장릉으로 이동했다. 개봉 직후 4주간 영월 지역 일평균 매출은 35.7% 증가했고, 숙박·식음 매출은 52.5% 늘었다. 4월 누적 관광객은 35만 명으로 영월 인구의 10배 규모다. 나룻배 선착장은 2시간의 대기줄이 생겼다.

이것이 바로 관광의 밀도다. 하나의 강력한 콘텐츠가 사람들의 시간과 감정을 하나의 지역에 폭발적으로 압축시킨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붐(boom)이 행정이 아닌 이야기가 만든 결과라는 점이다. 진정한 승부는 여기서부터다. 이 밀도는 지속 가능한가. 한국 지방관광의 반복되는 실패는 이 질문 앞에서 시작된다. 붐은 오지만, 전략이 없다.

실패는 대개 3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IP 하나에 기댄다. 영화가 끝나면 관심도 끝난다. 하지만 청룡포와 장릉은 단종이라는 서사 자체만으로 충분히 강력하다. 문제는 그 서사를 상설 체험, 교육, 야간 콘텐츠, 지역 브랜드로 확장하지 못하는 데 있다.

둘째, 체류 인프라가 약하다. 사람은 왔지만 머물지 않는다. 밤이 되면 문 닫는 도시에서 소비는 증발한다. 야간경제, 공연, 미식, 숙박의 구조가 없으면 관광객은 사진만 찍고 떠난다. 셋째, 거버넌스가 분절돼 있다. 축제는 축제대로, 교통은 교통대로, 문화는 문화대로 움직인다. 칸막이 행정은 붐을 지역경제 시스템으로 전환하지 못한다. 편의점만 들렀다 등지는 100만 명보다 하룻밤을 머물며 공연·식음·숙박을 소비하는 10만 명이 훨씬 강한 경제를 만든다. 관광의 경쟁력은 유입량이 아니라 체류 밀도다. 그래서 전략은 분명하다.

붐을 설계로 전환해야 한다. 스크린 투어리즘, SNS 바이럴, 지역축제. 밀도의 불씨는 어디서든 생길 수 있다. 하지만 그 불씨를 지속 가능한 산업 생태계로 키우는 것은 결국 리더십이다. 낮과 밤을 연결하고 동선과 소비를 연결하고, 하나의 IP를 도시 전체의 서사구조로 확장하는 능력. 이것은 행정의 언어가 아니다. 전략의 언어다.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유권자가 진짜 물어야 할 질문도 여기에 있다. 누가 예산을 더 가져올 것인가가 아니다. 누가 붐을 체류로, 체류를 소비로, 소비를 지역경제 구조로 전환할 수 있는가가 중요하다. 대한민국 관광의 미래는 ‘전국을 어떻게 고르게 살릴 것인가’보다, ‘어디에 세계적 임계 밀도를 만들고, 그 밀도를 어떻게 지속 가능한 구조로 바꿀 것인가’ 이 질문에 달려 있다. 관광은 사람을 이동시키는 산업이 아니다. 사람의 시간, 감정, 소비를 한 장소에 머물게 만드는 산업이다. 그리고 그 머무는 순간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이재환 박사 약력]
현 고양시 문화재단 선임직이사
현 강남구 관광진흥자문위원회 위원
현 한국뷰티문화관광협회 고문
현 현대아이티 고문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전 경기도청 도지사 경제특별보좌관
전 서울시립대학교 겸임교수
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전 KT 경제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전 사단법인 한국창업진흥협회 초대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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