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계 1년 살림살이를 결정짓는 ‘2027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 협상(수가협상)’이 막을 올렸다. 지역·필수·공공의료 강화를 위한 수가 보상 추진 등 대규모 건강보험 재정 투입과 추가 수입 재원 확보 불확실성 속에 재정 건전성을 담보해야 하는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리스크 속 경영 악화를 해소해야 하는 의약단체들 간 치열한 협상이 예상된다.
정기석 건보공단 이사장과 6명의 의약단체장들은 7일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2027년도 요양급여비용 계약 합동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자리엔 김택우 대한의사협회(의협) 회장, 유경하 대한병원협회(병협) 회장, 이정우 대한치과의사협회(치협) 회장 직무대행, 윤성찬 대한한의사협회(한의협) 회장, 권영희 대한약사회(약사회) 회장, 이순옥 대한조산협회(조산협) 회장이 참석했다.
이날 각 의약단체장은 경영 어려움을 토로하며 수가 인상 필요성을 주장했다. ‘수가’로 불리는 요양급여비용은 보건의료 서비스에 대해 건강보험 당국이 지불하는 대가다. 국민건강보험법에 따라 1년씩 계약이 이뤄지며, 매년 5월31일까지 건보공단과 의약단체들이 협상을 거쳐 체결한다.
해마다 내는 건강보험료는 수가협상 결과에 따른 영향을 크게 받는다. 국민으로부터 거둔 건강보험료로 의료 공급자에게 수가를 지급하기 때문에 재정을 책임지는 건보공단으로선 수가협상이 한 해 가장 중요한 과제다. 지난해에는 8년 만에 모든 유형의 수가 협상이 모두 체결됐다.
커지는 지정학적 리스크…의약단체들, 수가 인상 요구
김택우 의협 회장은 “최근 국내 여러 여건은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 특히 중동 전쟁의 여파 등으로 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의료기관을 둘러싼 환경 역시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며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갖고 이 자리에 왔지만, 결과가 다시 ‘역시나’로 끝난다면 의료기관들은 또다시 암담한 1년을 맞게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의원급의 수가 인상률은 1.7%로 타결됐다.
김 회장은 “의료기관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안전한 진료 환경이 조성돼야 결국 국민 건강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 부분을 공단에서도 더욱 깊이 고려해주길 바란다”며 “현재 약 30조원의 적립금이 있지만, 향후 고갈 가능성에 대한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고갈을 우려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안정적인 재정 확보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매년 재정 소요액, 이른바 ‘밴딩 폭’이 일정한 수준에서 정해지는 것을 문제로 들었다. 김 회장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의료기관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올해 수가 협상에서 보다 충분한 재정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라며 “밴딩 폭이 일정한 수준에서 정해지고 그 한정된 범위 안에서 배분이 이뤄지다 보니 협상은 늘 어렵고 결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올해만큼은 이 밴딩 폭을 보다 확대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최근 병협 회장에 취임한 유경하 회장도 “각종 운영비 부담까지 더해지면서 병원 경영의 지속 가능성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상황”이라며 필요한 인력을 고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 수 있도록 수가 현실화를 주문했다. 지난해 병원급의 수가 인상률은 2.0%로 타결됐다.
유 회장은 “응급의료, 소아진료, 중증외상 등 필수의료 분야는 그동안 병원들이 소명 의식과 책임감을 가지고 어렵게 유지해왔지만, 인구 구조 변화와 낮은 보상 수준이 맞물리면서 이제는 각 분야에 필요한 전문 인력을 안정적으로 배치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현실이 됐다”며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와 지역의료 공백 해소를 위해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실질적인 성과로 이어지기 위해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수가 체계의 현실화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이정우 치협 회장 직무대행은 “낮게 책정된 급여비용 구조로 인해 치과계, 특히 동네 치과의 경영 여건은 매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며 치과계 현실을 보다 세심하게 살펴봐 달라고 요청했다. 지난해 치과의 수가 인상률은 2.0%로 타결됐다.
이 직무대행은 “치과 의료는 보장성이 상대적으로 취약하고, 시장 변동성과 비용 상승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며 “최근엔 국내외 경제 여건 악화와 각종 비용 상승이 맞물리며 의료계 전반이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치과계 내부적으로도 불법 덤핑 치과 확산, 과도한 광고 경쟁, 대면 행정 업무의 포화, 보조인력 수급난 등 복합적인 구조 변화가 이어지고 있다”며 “대내외적 환경 속에서 동네 치과가 지속적으로 진료를 이어가기 위해선 현실을 반영한 수가 보상이 절실하다”고 덧붙였다.
한의계는 지난해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수가 인상률을 받아들였다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부담과 손해는 고스란히 한의계가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지난해 한의과 수가 인상률은 1.9%로 타결됐다.
윤성찬 한의협 회장은 “건강보험 진료비 유형별 점유율에서 한의 유형은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실수진자 수 역시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며 “정부가 실시 중인 약 54개 건강보험 시범사업 가운데 한의과가 참여하고 있는 사업은 단 4개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한의계는 △재활환자 재택의료 시범사업 △일차의료 만성질환관리 시범사업 △치매관리주치의 시범사업 등 한의 영역에서도 관리할 수 있는 질환군에 대해 참여를 요청해왔다.
윤 회장은 “한의 유형처럼 전체 건강보험 진료비 점유율 자체가 매우 낮은 분야는 수가 인상률이 동일하더라도 절대적인 재정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면서 “올해 수가 협상에선 단순히 과거 진료비 증가율만을 반영하는 기계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각 유형이 수행하는 의료의 공공성, 필수성, 정책 참여 기여도, 그리고 미래 의료체계에서의 역할까지 함께 고려하는 방향으로 개선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약사회는 코로나19 이후 수년째 장기화되고 있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문제를 꺼내들며 약국의 처방·조제 시스템 전반에 많은 차질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권영희 회장은 “수년째 장기화되고 있는 처방의약품의 수시 품절과 수급 불안정 문제는 이제 약국 현장의 노력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며 “약국은 처방의약품 품절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 매일 상당한 시간을 의약품 주문과 수급 확인에 할애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이번 수가 협상은 단지 한 해의 보상 수준을 정하는 절차를 넘어 약국 현장의 고충이 균형 있게 반영되는 계기가 돼야 한다”며 “이를 통해 약국이 국민 건강을 지키는 필수 보건의료기관으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동력이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부연했다.
조산사들은 저출생 지속에 따른 분만 인프라 유지를 촉구했다. 이순옥 조산협 회장은 “분만 인프라의 붕괴는 단순히 의료기관 수가 줄어드는 문제가 아니다. 이 땅의 모든 산모와 아기가 누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건강권마저 위협받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며 “조산사가 제공하는 맞춤형 돌봄과 전문 케어가 지속 가능하도록 현실적인 수가 반영이 절실하다”고 했다.
“큰 폭의 적자 예상…모두의 재정 관리 노력 필요”
건강보험 재정을 책임지는 건보공단의 셈법은 더 복잡해질 전망이다. 건보 재정은 적자 위기에 놓여 있다. 건보 재정은 5년 연속 흑자를 유지하며 누적 준비금은 30조2217억원을 적립한 상태이지만, 저성장 고착화와 생산연령인구 감소 등으로 보험료 수입 기반 확보 여력이 떨어지며 흑자 규모가 점차 감소하는 상황이다. 총수입 증가율은 2022년 10.3%에서 2023년 6.9%, 2024년 4.4%, 2025년 3.8%로 감소 추세다.
정기석 이사장은 “현재 건강보험 재정은 초고령사회 진입에 따른 진료비 증가 압박을 받고 있으며, 요양병원 간병비 급여화 추진 등 정부 정책에 따른 추가 재정 수요도 예정돼 있다”며 “반면 보험료율은 현재 7.19%로 법정 상한인 8%에 가까워지고 있어 추가적인 수입 재원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라고 전했다.
올해부터는 큰 폭의 재정 적자도 예상된다. 기획재정부는 올해 건강보험이 적자로 전환된 뒤 오는 2033년에는 현재 30조원에 달하는 누적 준비금이 소진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따라 건강보험 제도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
정 이사장은 “건강보험이 국민 건강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지속되기 위해선 가입자, 공급자, 보험자 모두의 재정 관리 노력이 필요하다. 동시에 중동 전쟁으로 인한 고유가·고물가·고환율의 여파에 따른 국민의 경제적 부담과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균형 있게 반영하는 협상이 돼야 한다”면서 “어려운 여건을 헤쳐 나가며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단체장 여러분의 넓은 이해와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