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2일 (2)
어김없이 드러난 의료 공급망 ‘약한 고리’ [취재진담]

어김없이 드러난 의료 공급망 ‘약한 고리’ [취재진담]

승인 2026-05-12 06:00:10
중동 전쟁의 불똥이 의료 현장으로 튀었다. 국제유가가 흔들리고,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 수급 불안정성이 커지면서 주사기, 수액세트, 투약병, 약포장지 같은 플라스틱 재질 의료제품 가격이 덩달아 올랐다. 병원과 약국에서 매일 쓰이는 이들 제품은 대체가 쉽지 않은 필수재다. 주사기 하나, 투약병 하나가 부족해진다고 당장 의료체계가 멈추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품목들이 동시에 흔들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진료와 투약, 처치의 기본 단위가 불안정해지는 순간 의료 현장은 비용 부담을 넘어 환자 안전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생산기업의 원료 보유 현황과 생산 상황을 점검하고, 주요 의료제품에 필요한 원료를 우선 공급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의료기관별 재고 과다·과소 현황을 분석해 공개하고, 매점매석이나 출고 조절 등 유통질서를 해치는 행위에 대해선 특별 단속에 나섰다. 이재명 대통령도 사재기와 담합 등 시장 교란 행위에 대해 “공동체의 위기를 이용해 위기를 악화시키며 돈벌이하는 반사회적 행태는 엄중하게 단죄할 것”이라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필수 의료제품을 쥐고 가격을 올리거나 물량을 조절하는 행위는 엄정히 다뤄야 한다. 의료제품은 일반 소비재와 다르다. 공급 차질이 생기면 병원과 약국의 불편으로 끝나지 않는다. 환자의 치료 지연, 의료비 부담, 의료기관 운영 차질로 이어질 수 있다. 위기를 틈탄 사익 추구를 방치하면 시장 신뢰는 무너진다. 단속과 행정처분은 필요하다.

하지만 단속은 급한 불을 끄는 수단일 뿐 불씨를 없애는 해법은 아니다. 매점매석을 적발한다고 해서 나프타 가격이 안정되는 것도 아니고, 담합을 처벌한다고 해서 해외 원료 의존 구조가 하루아침에 바뀌는 것도 아니다. 정부가 유통 현장을 아무리 조여도 원료가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은 돌 수 없다.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면 제품 가격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일부 유통업자의 일탈만이 아니다. 국내 의료제품 공급망이 국제 정세와 원자재 가격 변동에 지나치게 취약하다는 데 있다.

이는 의약품 수급 불안정 문제와 판박이다. 최근 몇 년간 해열제, 항생제, 소아용 시럽제, 필수의약품 품절 사태가 반복될 때마다 정부는 생산 독려, 대체약 안내, 유통 점검, 공급 중단 보고 강화 등으로 대응해 왔다. 그럼에도 수급 불안은 반복됐다. 의료계와 제약업계에선 의약품 품절이 단순한 물류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의존, 낮은 약가, 취약한 생산 인센티브가 겹친 구조적 문제라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원료의약품 문제는 더 심각하다. 완제의약품을 만들 공장이 국내에 있어도 원료가 없으면 약은 생산되지 않는다. 필수 의약품일수록 가격은 낮고 수익성은 떨어진다. 기업 입장에선 채산성이 낮은 품목을 계속 생산할 유인이 약하다. 결국 원료 생산은 비용이 낮은 해외로 빠지고, 완제품 생산과 유통에 기대는 구조가 굳어진다. 평상시에는 값싼 조달이 효율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쟁, 팬데믹, 무역 갈등, 물류 대란이 닥치면 그 효율은 곧 취약성이 된다.

정부는 국산 원료의약품 사용 필수의약품에 대한 약가 가산, 생산기술 개발 지원, 핵심의약품 비축, 원료약 구매 다변화 지원 등을 추진하고 있지만, 현장의 체감은 크지 않다. 국산화 필요성은 반복해서 강조되지만, 기업이 실제로 생산에 뛰어들 만큼의 경제적 유인은 충분하지 않다. 낮은 단가, 불확실한 수요, 까다로운 품질 기준, 설비 투자 부담이 겹치면 국내 생산은 구호에 그치기 쉽다.

주사기나 약포장지, 투약병은 고부가가치 첨단제품이 아니다. 하지만 의료체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반재다. 시장에만 맡기는 구조는 위기 때 가장 먼저 흔들린다. 수익성이 낮은 필수재를 누가, 어느 정도, 어떤 조건으로 생산하고 비축할 것인지에 대한 공공의 설계가 필요하다.

정부 대응도 단속 중심에서 공급망 관리 중심으로 옮겨가야 한다. 필수 의료제품과 원료의약품의 해외 의존도를 품목별로 정밀하게 파악해야 한다. 단순히 ‘수입 비중이 높다’는 수준이 아니라 어느 국가와 기업, 원료에 병목이 있는지 상시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또 특정 국가와 공급처에 집중된 조달 구조를 다변화해야 한다. 필수 품목은 국가 차원의 비축 기준을 세우고, 민간 재고와 공공 비축을 연계하는 조기경보 체계도 강화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싸게 사는 것’만을 효율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건의료 공급망에서 효율은 단가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 조금 비싸더라도 국내 생산 기반을 유지하고, 여러 공급처를 확보해 위기 때 버틸 수 있는 재고를 갖추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더 싼 선택일 수 있다. 의료제품 공급망은 평상시에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위기 때는 국가의 대응 능력을 가르는 핵심 인프라가 된다.

물론 모든 원료와 원자재를 국내에서 생산할 수는 없다. 완전한 자급자족은 현실적이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해외에 맡기는 구조 역시 위험하다. 필수의약품, 응급·중환자 진료에 필요한 의료소모품, 감염병 대응 물품, 대체가 어려운 원료의약품부터 우선순위를 정해 전략적 자립에 나서야 한다.

혼란을 양분으로 자라는 기업에 대해선 행정처벌이 필요하다. 위기를 악용하는 시장 교란 행위에는 단호해야 한다. 그러나 처벌은 증상을 억제하는 진통제에 가깝다. 지금의 혼란을 일부 업체의 탐욕만으로 설명해선 안 된다.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따로 있다. 왜 우리는 다른 국가에서 전쟁이 날 때마다, 감염병이 번질 때마다, 물류가 막힐 때마다 같은 불안을 반복해야 하는가.

단속은 질서를 세우는 일이고, 공급망 개편은 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은 눈앞의 시장 교란 행위를 엄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료제품과 원료의약품 공급망의 약한 고리를 손보는 것이다. 때려잡는다고 없던 물품이 나오거나 사태가 해결되진 않는다.
신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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