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출신 첫 대통령 이재명…안동 출신 소년공의 반전 드라마 [이재명 정부]

노동자 출신 첫 대통령 이재명…안동 출신 소년공의 반전 드라마 [이재명 정부]

중학교 진학 대신 공장 취업…인권변호·시민운동 나서
성남시의료원 설립 좌절 후 정치 입문
성남시장·경기지사·국회의원·당 대표 연임
“세상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따뜻한 존재가 되고 싶어”

기사승인 2025-06-04 06:00:08 업데이트 2025-06-04 06:45:55
제21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 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당사에 도착하고 있다. 유희태 기자


“그 꼬맹이를 공장에 데려다 줄 때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겠나”


이재명 대통령 당선인은 ‘소년공’이 된 자신을 공장 앞까지 데려다주던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시울을 붉혔다. 시간이 흘러 자신의 어려움보다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게 된 그는 이제 대통령이 되어 “(저도 힘들게 살았지만) 지금도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며 “저도 세상 사람들에게 어머니 같은 따뜻한 존재가 되고 싶다”고 다짐했다. 

이 당선인은 1964년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의 한 산골 마을에서 5남2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출생신고도 제때 하지 못해 생일조차 정확히 알지 못했고, 매일 왕복 10㎞ 산길을 걸어 국민학교를 다녔다. 국민학교 졸업과 동시에 경기도 성남으로 이주한 그는 가족들과 단칸방에 기대어 살았다. 

그는 중학교 진학 대신 소년공이 됐다. 법적으로 취업이 불가능할 만큼 어린 나이였던 그는 동네 형의 이름을 빌려 위장 취업을 했다. 성남시 상대원동에 있던 ‘동마고무’ 공장에서 시작한 소년공 생활은 무려 6년 동안 이어졌다.

군 복무는 면제됐다. 대양실업이라는 야구 글러브 공장에서 프레스 작업을 하던 중 왼쪽 팔이 끼는 사고를 당한 탓이다.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해 팔은 뒤틀린 채로 남았고, 결국 6급 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1982년 중앙대학교 입학식에 교복을 사 입고 간 이재명 당선인. 더불어민주당 제공


절망 속에서도 그는 학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중·고교 검정고시에 도전하게 된 계기는 ‘공장 관리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1년 만에 검정고시를 통과한 이 당선인은 내친 김에 대입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낮에는 공장 일, 밤에는 학원을 다니며 공부에 매진한 끝에 그는 1982년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20만원까지 받고 중앙대 법학과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실상을 접한 그는 ‘배움’을 계기로 삶이 변했다. 과거 공장에서 들었던 ‘폭도’라는 단어가,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이들의 고통을 가리던 낙인이었음을 알게 된 것도 이때였다. 그는 반드시 사법시험에 합격해 제도권 안에서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가난과 부조리를 개혁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986년에 사법고시에 합격해, 1988년 사법연수원(18기)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출세가 보장된 판검사 대신 변호사의 길을 택했다. 연수원 시절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당선인은 성남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려 노동과 인권 변호사로 활동했다. 동시에 시민운동에도 뛰어들었다. 그는 성남 구시가지 내 대형 병원들이 계속 문을 닫자 성남시민들과 함께 성남 공공의료원 설립을 목표로 주민 발의 조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의료 공백을 해결하고자 했던 2만 여명의 성남 주민의 꿈은 당시 한나라당이 포진하고 있던 성남시의회에 가로막혔다. 이 대통령은 경선 직후 대선 후보 수락연설에서 “2004년 3월28일 성남공공병원을 만들기 위해 출마를 결심했다”고 밝혔다. 

2000년 분당 부당용도변경 반대 집회에 참석한 이재명 당선인. 더불어민주당 제공

이 당선인의 정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2006년 열린우리당에 입당해 성남시장에 출마했지만 낙선했다. 2008년 18대 총선에서는 성남분당갑에 출마했지만 떨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2010년 성남시장에 당선된 그는 취임 직후 ‘성남 모라토리엄(채무지급유예)’을 선언하며 7천억 원에 육박하던 성남시 부채를 모두 해결했다. 재임 기간 그의 공약 이행률은 95%에 달했다.

2014년 성남시장 재선에 성공한 그는 청년과 저소득층을 위한 복지 정책을 적극 펼쳤다. 생리용품 지원, 무상 교복 지원 등 현재 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정책들은 그의 ‘성과’이기도 하다. 

이 당선인은 2016년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에 맞서 ‘박근혜 하야’를 정치권에서 처음 주장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당내 기반을 확보해, 2017년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 출신 대통령’을 내걸고 민주당 대선 경선에 나섰지만 문재인, 안희정이라는 유력 대선 주자의 벽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다만 경선 3위, 득표율 21.2%를 얻은 그는 차기 대선 주자로 급부상했다.

그는 좌절하지 않고 2018년 경기도지사에 출마해 보수 정당이 16년간 지켜온 자리를 탈환했다. 취임 직후 ‘기본소득위원회’를 설치하고, 청년 배당, SK하이닉스 반도체 클러스터 유치 등 굵직한 성과를 냈다. 코로나19 당시 종교단체 신천지를 대상으로 방역 목적 강제 조사 실시,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 검토 등 초강수로 전국에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2021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이낙연 전 총리를 상대로 과반을 득표하며 다시 대권에 도전했지만, 2022년 대선에서 윤석열 후보에게 불과 0.73%포인트 차이로 아쉽게 패배했다.

2025년 국회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의원총회에 참석한 이재명 당선인. 더불어민주당 제공 


그는 대선 패배 직후 2022년 6·1 지방선거와 동시에 치러진 인천 계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도전해 곧바로 중앙정치에 복귀했다. 같은 해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서 77.77%를 득표해 승리했다. 사법 리스크, 당내 갈등, 단식과 테러 등 정치적 위기가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매번 정면 돌파를 택했다. 

2024년은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의 해로 불렸다. 22대 총선에서 민주당을 175석의 대승리로 이끌며 당내 입지를 다졌고, 같은 해 8월 치러진 당대표 선거에서는 85.4%라는 압도적 지지를 얻었다. 이는 민주계열 정당 역사상 김대중 전 대통령 이후 첫 당대표 연임이기도 했다.

3년 뒤를 준비하던 그의 대선 시계는 12·3 비상계엄 사태를 기점으로 빨라졌다. 민주당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를 내란 사태로 규정하고 속전속결로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의결시켰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인용은 결국 그의 대권 가도를 여는 열쇠가 됐다. 끝내 2025년 6월, 그는 제21대 대통령으로 대한민국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됐다.

소년공 이재명을 떠올리며 울먹이던 그는 당선이 확실시 되던 4일 새벽 ‘빛의 혁명’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연설을 통해 “지금부터 새로운 출발을 하자”며 “어우러져 함께 살아가는 세상, 공평하게 기회 함께 누리는 억강부약의 대동세상을 우리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다. 함께 가자”고 밝혔다. 

권혜진 기자
hjk@kukinews.com
권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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