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5일 (5)
K-콘텐츠를 ‘관광 경제’로, 민관 재설계 나서야 [이재환 박사의 K-컬처 & 관광⑧]

K-콘텐츠를 ‘관광 경제’로, 민관 재설계 나서야 [이재환 박사의 K-컬처 & 관광⑧]

승인 2026-04-06 13:00:04 수정 2026-05-18 13:15:51

지난 1월11일 K팝을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2관왕을 거머쥐었다. 오스카 트로피까지 들어 올린 케데헌은 K-콘텐츠 역사상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한국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는 영화가 전 세계 관객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어 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린다’는 메기 강 감독의 소감은 K-콘텐츠가 인류 공통의 보편적 감성을 관통하고 있음을 확인시켰다. 

이어 3월21일 저녁, 광화문 광장은 거대한 K-콘텐츠의 용광로가 됐다. 방탄소년단(BTS)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아리랑’을 선보이는 공연에서 앞자리를 메운 것은 200여 명의 외신 기자단과 전 세계에서 날아온 ‘아미(ARMY)’였다. AFP는 아리랑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해설했고, BBC는 문화의 힘으로 승부하는 BTS의 영향력과 K-컬처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주요 외신들이 현장을 실시간으로 타전하며 한국 문화의 뿌리와 파괴력을 조명하는 모습은 K-콘텐츠가 변방의 유행을 넘어 세계 주류 문화의 정점에 섰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광화문 이벤트는 ‘넷플릭스 77개국 1위’라는 성적표로 돌아왔고, 세계는 대한민국이 창조해 내는 다음의 그 ‘무엇’을 기대하며 숨죽이고 있다. 하지만 가슴 벅찬 감동 이면에선 서늘한 긴장감도 스친다. 이 경이로운 성취의 여정에서 국가와 행정은 어디에 있었는가. 지난 30여 년간 우리 문화가 거둔 승전보는 민간의 자생력이 일군 ‘고난의 행군’의 결과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때 ‘딴따라’라는 비하와 조롱을 견디며, 척박한 창작 환경에서 제 몸을 갈아 넣어 꽃을 피운 이들은 아티스트와 기업들이었다. 국가는 그들이 피땀 흘려 일군 기름진 들판에 숟가락을 얹어 ‘문화 강국’의 수식어를 전유해 오지 않았던가. 

이제 무임승차의 유통기한은 끝났다. 콘텐츠의 성공이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지속 가능한 먹거리, 즉 ‘관광 경제’의 실핏줄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민·관의 역할 분담이 재설계되어야 한다. K-콘텐츠를 즐기는 전 세계 펜덤을 실제 한국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이 지갑을 열게 하는 관광 인프라 구축은 민간의 창의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에 들어섰다.

가장 시급한 것은 데이터 기반의 인프라 혁신이다. 정부가 보유한 방대한 공공데이터와 문화 자원을 박제된 기록물로 두지 말고, 민간 기업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놀이터’로 개방해야 한다. 어떤 지역의 어떤 이야기가 글로벌 타깃에게 통하는지, 관광객의 이동 경로는 어떻게 최적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스템적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또 행정의 패러다임을 ‘관리와 규제’에서 ‘경청과 서비스’로 과감히 전환할 필요가 있다. 예산 지원을 빌미로 창작자를 가르치려 들거나, 낡은 법규를 들이대며 관광 상품 개발의 발목을 잡는 행위는 문화 강국의 품격에 맞지 않는다. 창작자들이 마음껏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간섭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 활동이 수익성 있는 관광 콘텐츠로 전환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애물을 치워주는 것이 서비스 행정의 본령이다.

실제로 현장에서 체감하는 장벽은 여전히 높다. 전 세계 팬들이 열광한 K-드라마의 촬영지나 뮤직비디오 속 현장을 찾아가려 해도, 막상 가보면 군사보호구역이나 개발제한구역이라는 푯말에 가로막히기 일쑤다. 지자체는 관광객을 부르고 싶어하지만, 부처 간 칸막이에 막힌 규제로 인해 포토존 하나 설치하는 것조차 수개월간의 행정 절차가 이어진다. 이는 단순한 물리적 접근의 문제가 아니다. 콘텐츠가 가진 무형의 가치를 유형의 경제 자산으로 치환하려는 민간의 아이디어가 관료주의라는 벽에 부딪혀 사장되고 있는 뼈아픈 현실이다.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민·관 협동 거버넌스의 실질적 가동이다. 보여주기식 위원회가 아닌, 민간의 창의적 기획안이 행정의 규제 벽에 부딪힐 때 이를 즉각 조정하고 해결할 수 있는 ‘패스트트랙’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해외 성공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본의 경우 ‘쿨 재팬(Cool Japan)’ 전략을 통해 민관 합동 펀드를 조성했다. 애니메이션 속 배경지를 관광 자원화하는 성지순례 마케팅에 지자체와 철도 회사, 중앙 정부가 유기적으로 결합해 막대한 경제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 프랑스는 오래 전부터 문화부와 외교부가 협력해 ‘프랑스 문화원’을 전 세계 콘텐츠 유통과 관광객 유치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는 고도의 거버넌스를 체제화했다. 1970~1980년대 ‘불란서 문화원’에서 영화와 음악을 감상하며 국제감각을 배운 경험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문화 외교와 마케팅에서 성공한 나라들은 콘텐츠를 단순한 볼거리가 아닌, 국가의 핵심 산업 생태계로 보고 민간의 야성을 행정이 정교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영국 리버풀은 ‘비틀스’라는 자산을 통해 도시 전체를 거대한 문화 관광 경제체로 탈바꿈시켰다. 광화문에서 울려 퍼진 ‘아리랑’이 제2, 제3의 리버풀을 만들어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콘텐츠는 민간이 만들되, 그 콘텐츠가 통하는 길은 국가가 닦아야 한다.

국민과 대중은 이미 저만치 앞서 달려가고 있다. 국가 정책이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면 K-콘텐츠의 전성기는 ‘짧은 봄’으로 끝날지 모른다. 이제 민과 관이 머리를 맞대고 구조적 혁신을 단행해야 할 때다. 홀로 싹틔워 피어난 꽃이 무성한 나무와 숲이 되기 위해서는 국가라는 든든한 대지가 뿌리를 보듬어 안아야 한다.


[이재환 박사 약력]

현 고양시 문화재단 선임직이사
현 강남구 관광진흥자문위원회 위원
현 한국뷰티문화관광협회 고문
현 에델만 고문

전 한국관광공사 부사장
전 경기도청 도지사 경제특별보좌관
전 서울시립대학교 겸임교수 
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전 KT 경제경영연구소 연구위원
전 사단법인 한국창업진흥협회 초대 회장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추천해요
    0
  • 슬퍼요
    슬퍼요
    0
  • 화나요
    화나요
    0

쿠키오리지널

전체보기

쿠키피드

전체보기

슥- 넘겨 보는 세상 이야기, 기자의 솔직한 코멘터리까지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