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세잔은 어린 시절 엑상프로방스의 비베무스(Bibemus) 채석장 근처 오두막에서 아침 햇살을 맞으며, 생트빅투아르산의 찬란한 광경을 마주했을 것이다. 황금빛 협곡 너머, 르톨론 마을과 계곡을 지나 지평선 위로 솟은 산은 석회암으로 덮여 아침에는 하얗게, 해질녘에는 분홍과 주황빛으로, 저녁에는 보라색으로 물들었다.
생트빅투아르산은 프로방스 정체성의 상징이다. 기원전 102년, 로마 장군 카이우스 마리우스가 추천족과 킴브리아 족을 물리친 전투 장소로, “빅투아르”라는 이름은 그 승리를 기념한다.
전설에 따르면 전투에서 흘린 피가 땅을 붉게 물들였다고 한다. 1875년에는 보불전쟁 당시 프랑스를 지켜낸 신의 도움에 감사하며, 산 정상에 금속십자가를 세웠다.
세잔의 생전에는 고고학적 관심이 높아지며 생트빅투아르산의 역사적 중요성도 커졌다. 그의 친구 누마 코스테(Numa Coste)는 이 산을 “신화 속 키클롭스가 세운 거대한 단일 피라미드”에 비유했다.
1886년 프로방스로 영구 귀환한 이후, 생트빅투아르는 세잔에게 가장 강렬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는 고생물학자 친구 앙뚜안 포르튀네 마리옹(Antoine-Fortune Marion)과 함께 다윈의 진화론, 프로방스의 역사 그리고 산 기슭에서 발견한 유인원 골격에 대해 지적 교류를 나누었다.
또한 세잔은 지질학에 대한 초기 열정을 재발견하며, 그것이 회화에 대한 청사진이 된다는 것을 깨달었다.
“풍경을 잘 그리려면 먼저 그 지형의 지질 구조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며, 지층의 평면과 암석의 뼈대를 마음 속으로 그려냈다. 그의 그림은 붉은 흙덩이가 심연에서 솟아오르는 듯한 생명력을 담고 있다.
세잔은 1903년 미술상 앙브루와즈 볼라르에게 “나는 히브리인들의 위대한 지도자처럼 될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까?”라고 썼다.
예술은 순수한 마음을 필요로 하는 사제직이며, 완전히 헌신하는 자들만이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이 담겨 있다.
세잔은 말했다. “똑같은 사물도 다른 시각에서 보면 엄청나게 흥미롭고 그만큼의 다양성을 갖춘 연구대상으로 변하므로, 나는 지금 고개를 더 오른쪽으로, 그리고 다시 더 왼쪽으로 돌리는 행동만으로도 이 자리를 전혀 떠나지 않은 채 최소 몇 달 동안은 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피터 한트케는 1979년 세잔의 전시회에서 방 전체를 빙 둘러가며 저마다 다른 각도에서, 하지만 항상 멀리 평지에서 바라보고 그린 생트빅투아르산의 봉우리만 전시되어 있는 걸 보았다. 작가는 전시회에서 산 그림을 곧장 지나쳐갔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생트빅투아르산을 가까이서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생트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며 한트케는 생각했다. “세상의 중심이란, 델피와 같은 곳보다는 위대한 예술가가 작업했던 저 장소가 아닐까?”
세잔과 졸라는 엑상프로방스의 콜레주 부르봉에서 만난 중학교 동창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문학과 예술을 꿈꾸며 떨어질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졸라의 소설 “작품” 속 화가가 세잔을 연상케 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났다.
폴 알렉시스(Paul Alexi, 1847~1901)는 졸라와 평생 교류한 문학적 동지였다. 그는 기자, 극작가, 소설가로 활동하며 졸라와 함께 자연주의 문학을 발전시켰다.
로브 거리에 있는 세잔의 작업실에는 그의 정물화에 등장하는 소품들이 있다. 창턱의 말라비틀어진 과일 곁에는 두꺼운 검은 웃옷도 걸려 있다.
세잔은 아주 일찍 일어나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여섯 시부터 열 시 반까지 아틀리에에서 일하고 엑스로 돌아와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는 즉시 저녁 다섯 시까지 모티브나 다른 곳에서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바로 잠잘 채비를 했다. 심한 당뇨를 앓고 있었는데, 너무 과로한 나머지 어떨 때는 애기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혼수상태로 잠이 들었지만, 아침이면 그런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이 그림은 세잔의 작업실 근처의 버려진 집을 묘사한다. 평소 자연의 구조적 질서를 탐구하던 세잔이 단 한 번만 이 집을 그렸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왜 한 번뿐이었을까? 샤피로는 이 그림을 통해 세잔이 친밀감과 긴장감, 불안함과 고요함이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표현한다고 분석한다.
1895 년부터 1899년까지 세잔은 엑상프로방스 동쪽에 위치한 비베무스(Bibemus) 채석장을 집중적으로 그렸다. 이곳은 무성한 초목과 인공적으로 깎인 붉은 석회암이 어우러진 독특한 지형으로, 세잔의 후기 작품 세계와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그는 생생한 색채와 거친 붓터치를 통해 이 풍경을 화면 속에 옮기며, 평면 속에 깊이와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1899년, 세잔은 엑상 프로방스에 정착한 뒤, 매일같이 주변 풍경을 탐색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다듬어 나갔다. 그 중에서도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르톨레도 마을 위쪽에 위치한 오래된 저택으로 신 고딕 양식으로 재건된 성채, 샤토 누아르(Chateau Noir)였다.
세잔은 전나무 숲을 지나 ‘악마의 성’이라 소문난 곳으로 에밀 베르나르와 마차를 타고 소풍을 갔다. 세잔은 노령임에도 바위 사이를 뛰어다닐 만큼 민첩했지만, 몸의 균형을 잃으면 네 발로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세잔은 에밀에게 근처의 농가를 소개하며 함께 그림을 그리며 살자고 권했다. 말년의 세잔에게 에밀은 유일한 친구였다.

세잔의 <샤토 누아르>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 의해 파리로, 1906년 10월 6일, 인상주의 거장인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소유하게 된다. 이후 모네의 둘째아들 미셸이 물려받고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과 모마(MoMA)로 가게 된다. 나 역시 작품의 발자취를 따라 지베르니와 모마에서 두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세잔은 새로움에 열정을 가진 지성이었다. 자신만 알고 있는 방법을 너무 복잡하게 해서 고통스럽고 거의 마비를 불러왔다. 위대한 대가들은 모두 독창성을 가지고 있으며, 독창적일수록 그들의 솜씨는 더 완벽하다. 예술의 큰 어려움은 독창성과 모방을 적당히 안배하는 일이다.
화가가 새로운 화법을 추구할 때, 가장 먼저 그 가치를 알아보는 이는 동료 화가들과 화상이다. 모네는 세잔의 유화 14점과 수채화 1점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1870년대 초부터 자신의 작품 대금 일부를 세잔의 그림으로 받기도 했다. 이는 세잔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홍석원 기자 001hong@kuki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