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제약·바이오 투자 시장이 구조적 재편 단계에 들어섰다는 진단이 나왔다. 인공지능(AI), 크로스보더 협력, 중동·아시아 시장 부상 등으로 새로운 기회는 열리고 있지만, 투자자들의 눈높이는 한층 높아졌다는 평가다. 특히 국내 헬스케어 기업이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선 기술력뿐 아니라 해외 시장 진입 전략, 인재 확보, 단계별 자금 조달 계획, 출구 전략까지 종합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조언이 이어졌다.
해외 벤처캐피털(VC) 및 투자 전문가들은 28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바이오 코리아 2026’의 ‘제약바이오 혁신을 위한 글로벌 투자 지형 포럼 세션’ 좌담을 통해 바이오헬스 산업의 투자 환경이 과거와 달라졌다고 입을 모았다. 자본 자체는 여전히 시장에 존재하지만, 투자 집행은 훨씬 더 선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양펑(Frank Yang) 블루 오션 케피탈(Blue Ocean Capital) 창립 파트너 겸 최고경영자(Founding Partner & CEO)는 현재 시장 상황을 두고 “구조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구조적 차이가 기업 간 격차를 만들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홍콩과 중국 시장의 사례를 언급하며 “홍콩은 한국과 유사하게 지난해 바이오 분야에서 활발한 기술수출(라이선스 아웃)이 이뤄졌고, 생명공학 분야 자금 조달도 많았다”며 “바이오 기업 투자 유치의 상당 부분이 홍콩 시장에서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양펑 CEO는 특히 신약 발굴 자체보다 AI 기반 연구개발(R&D) 환경을 어떻게 구축하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중국에서도 AI와 바이오가 결합된 영역에 상당한 규모의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며 “이제는 더 큰 시장, 다른 시장에 진출하는 데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해외 진출의 의미를 단순한 제품 판매로 좁혀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양펑 CEO는 “해외에 간다는 것은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파트너를 만나는 과정”이라며 “실제 중국과 홍콩에 포트폴리오 기업을 데려와 현지 전략 기업과 제휴를 맺고 협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동 시장에 대해서도 주목했다. 그는 “사우디아라비아는 단순히 투자를 유치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술을 이전받고 역량을 확보하려는 의지가 강해 보인다”며 “현지 제조사와 관계를 맺는 것은 글로벌 최고 기술에 접근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현지화와 로컬화는 필요하지만,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염두에 두는 전략이 맞다”고 덧붙였다.
바수데브 베일리(Vasudev Bailey) 어노멀리 벤처스(Anomaly Ventures) CEO도 바이오 투자 시장에서 좋은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그는 “회사의 어떤 좋은 기술이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며 “흥미로운 임상 데이터를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투자 유치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고 진단했다.
베일리 CEO는 VC 회사들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아진 만큼 기업은 자본 조달 전략을 더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바이오 벤처 투자는 데이터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신뢰가 핵심이라고 짚었다. 그는 “가장 좋은 데이터가 있더라도 결국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어떤 인간관계를 구축했는지가 중요하다”며 “투자자는 사람을 보고 결정한다”고 강조했다.
장-크리스토프 르농댕(Jean-Christophe Renondin) 베살리우스 바이오캐피털(Vesalius Biocapital) 매니징 파트너(Managing Partner)는 투자 시장의 유동성 문제를 지적했다. 그는 “현금은 많아졌지만, 유동성은 줄어든 상황”이라며 “바이오텍은 성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이전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해졌다”고 전했다.
그는 기업공개(IPO) 시장 위축도 바이오 투자 생태계의 부담 요인으로 꼽았다. 르농댕 매니징 파트너는 “IPO 시장이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고, 투자자들에게 자본을 돌려주기도 어려워졌다”며 “이런 상황이 악순환을 만들 수 있다”고 짚었다.
다만 그는 저조한 투자 환경 속에서도 기회는 있다고 봤다. AI와 같은 구조적 변화가 대표적이다. 르농댕 매니징 파트너는 “글로벌 빅파마가 어떤 기술을 선택하고, 어떤 기술을 실제로 적용할 것인지가 훨씬 선별적으로 바뀌고 있다”며 “단순히 기술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어떤 기술이 더 좋은 기술인지 입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내 바이오 기업의 출구 전략에 대해선 우려도 제기됐다. 르농댕 매니징 파트너는 “한국 투자자들을 만나보면 출구 전략을 IPO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며 “초기 단계에서 IPO를 목표로 하는 경향이 있는데, 공공시장의 변동성과 자본 회수 가능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이슨 힐(Jason Hill) 버티컬 VC(Vertical VC) 최고전략책임자(Chief Strategy Officer)는 지난 2024년 위축됐던 바이오헬스 섹터 투자 흐름이 2025년부터 다시 반등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만 투자 시장의 규칙 자체가 바뀌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과거 패러다임이 기술 중심이었다면 지금은 새로운 운용 환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해졌다”며 “기업과 투자자 모두 새로운 운용 환경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AI가 바이오 투자 시장에 새로운 기회를 만들고 있다고 봤다. 하지만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시장에서 어떤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 그 스토리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아시아 시장에선 디지털 헬스와 인구 문제 해결형 솔루션을 유망 분야로 꼽았다. 힐 최고전략책임자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보건의료 서비스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향이 중요하다”며 “고령화, 만성질환 증가, 젊은 부양 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업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케리 리 싱클레어(Kerri Lee Sinclair) 오스바이오텍(AusBiotech) 디렉터(Director)는 바이오 기업이 초기 개발 단계부터 임상시험, 규제 승인, 환자 치료, 상용화까지 이어지는 전 과정을 고려해 자금 조달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싱클레어 디렉터는 “투자자들은 자산 자체뿐 아니라 글로벌화 가능성, 미래 자본 조달 계획, 리스크 완화 전략을 함께 본다”며 “지금보다 두 단계 뒤를 보고 시작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예컨대 임상 1상 단계의 기업이라도 상용화 단계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 수 있는지, 어떤 자본이 필요할지, 규제와 시장 진입 전략은 어떻게 가져갈지에 대한 답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그는 각 성장 단계에 맞는 자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싱클레어 디렉터는 “정부 승인과 인허가를 모두 받은 뒤에야 자본을 달라고 하면 안 된다”며 “각 사업 단계마다 적절한 자본과 접촉하고, 네트워크를 쌓으며 신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전했다.

















































